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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젤라 오] 목사 손녀가 ‘젠(Zen)’ 전도사 되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5화> '한인사회의 대변인' 앤젤라 오 변호사
<8> 목사 손녀 ‘젠(Zen)’ 전도사 되다
정장 수트 대신 회색 수련복…“홀가분합니다”

미국 본토에 처음 설립된 한인교회 LA한인연합감리교회 건물 전경. [중앙 포토]

미국 본토에 처음 설립된 한인교회 LA한인연합감리교회 건물 전경. [중앙 포토]

9·11 테러사건 계기로
카운티 직원 상담 맡아
인종 갈등 해결책은 ‘마음’
선 명상으로 하루 시작


이민자 커뮤니티의 성장은 인종별로 조금씩 다르다. 한 예로 일본계 커뮤니티는 농구가 중심이 되어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일본 커뮤니티가 자리 잡고 있는 LA 다운타운 리틀도쿄나 토런스, 가디나 지역에는 청소년 농구팀들이 꽤 유명한데 그 이유는 쟁쟁한 일본계 학생들이 넘쳤기 때문이다.

일본계 가정들은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농구를 가르쳤다. 지금도 이 전통은 계속되는 것 같은데 팀워크와 경쟁을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어릴 때 농구를 하면서 다진 우정은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 연결됐고 이는 일본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단단한 네트워크가 됐다.

반면 중국계는 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사업은 물론 개인적인 만남도 가족의 일원을 알아야 연결이 됐기 때문에 인맥이 중요하다.



여름 편안한 젠 스타일의 복장을 입고 UCLA 캠퍼스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앤젤라 오 변호사. [중앙 포토]

여름 편안한 젠 스타일의 복장을 입고 UCLA 캠퍼스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앤젤라 오 변호사. [중앙 포토]

그런데 한인 커뮤니티는 교회가 중심이었다. 교회를 통해 사람들은 만남을 이어갔고 사회적인 네트워크도 구축했다.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전쟁 이후 빠르게 성장했다. 배고픈 이들이 교회를 찾아가면 선교사들은 먹였다. 기독교는 한국에서 시작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런 기억들로 인해 낯선 미국 땅에 도착해 마음을 잡지 못한 한인 이민자들이 교회를 마치 고향 집처럼 다가갈 수 있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네 편 내 편으로 나눠 끊임없이 싸웠다. 싸움의 원인을 들어보면 양쪽 모두 타당했다. 2세인 내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교회에서 점점 멀어지다

친할아버지는 목사님이었다. 그것도 미주 한인 교회사를 상징하는 LA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목회를 했었다. 목사의 아들인 아버지의 큰 딸로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렇지만 늘 내가 갖고 있던 삶에 대한 질문의 답은 교회에서도, 성경에서도 찾지 못했다.

LA폭동이 일어났을 때 폭동이 지나고 난 후 겪은 수많은 경험에 ‘왜’라는 질문을 들고 교회를 찾아가 밤새 기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답도 들을 수 없었다.

형사법 변호사의 길은 무거웠다. 평범한 아이들이 살인죄로, 마약 관련 범죄자로 체포되고 유죄를 선고받고 감옥에 가는 모습들을 볼 때마다 마음의 짐이 무거워졌다. 조금씩 지쳐갔다.

▶9·11 이후 재발견한 삶의 의미

2001년 9·11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무장 조직 알카에다의 일으킨 테러 사건으로 3000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고 최소 6000여 명 이상이 부상했다. TV 화면을 통해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D.C.의 국방부 청사 건물인 펜타곤이 무너지는 모습에 아마 나뿐만 아니라 그 장면을 지켜본 모든 사람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때 LA카운티 정부의 요청으로 인간관계위원회 산하 특별 자문위원으로 임명됐다. 내 임무는 산하 22개 부처를 다니며 직원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시간도 자유롭게 쓰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상한 업무였다.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의문은 쉽게 풀렸다.

폭탄을 안고 빌딩으로 돌진하는 장면을 보며 느낀 충격과 스트레스, 삶의 허무함 등을 직원들은 나에게 털어놨다. 그들은 가족과 동료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고 함께 할 방법을 알고 싶어했다. 대화 속에 인종 간의 갈등 문제는 없었다. 나는 함께 그들과 웃고 울었다.

▶지친 마음 ‘선’으로 달래다

LA폭동이 10년을 맞으면서 한인 커뮤니티도, 주류사회도 LA폭동의 기억과 아픔을 서서히 걷어내고 있을 때였다. LA폭동 이후 인종갈등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늘 긴장했던 나는 죽음 앞에서는 날카로운 법률적 지식과 논리가 아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의 삶 속에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명료해졌다.

법을 저지른 청소년을 변호하는 법정 대신 다른 방법으로 청소년들을 선도하는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때마침 UCLA에서 강의를 가르쳐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사회와 인종갈등, 인권에 대해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마다 UCLA 교수 자격으로 캠퍼스에서 강의하며 학생들을 만났다. 또 가주 검찰청 특별검사로 청소년 범죄예방 프로그램 운영을 맡았다. 하지만 전국 곳곳에서 들어오는 강연 요청을 아예 뿌리칠 수 없기에 소수계와 여성 인권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알리는 행사는 가능한 참석했다.

개인 변호사 사무실은 거의 나가지 않았다. 가끔 비즈니스 운영이나 형사법과 관련된 컨설팅만 했다. 그러다 모임에서 우연히 ‘선(Zen)’을 알게 된 후 명상을 시작하게 됐다. 매일 아침 명상하는 시간을 통해 나 자신을 찾았다. 젠을 더 배우기 위해 하와이에 집을 얻어 수개월씩 머물기도 했다.

◈미주 한인 기독교 역사

미주 한인 기독교 역사는 한인 이민사와 함께 시작한다. 기록에 따르면 1903년 당시 인천항을 출발해 하와이에 도착한 이민 선조들은 여정을 푼 곳에 예배 처소를 세우고 사탕수수 농장일을 하면서도 매주 일요일이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 하와이 교회의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05년에 모든 하와이 감리교인들 중 65%가 한국인이었으며, 1910년에는 68%가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미국 본토에는 1936년 나성한인연합감리교회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LA국제공항 근처에 있는 이 교회는 지금 2~3세가 주축이 되어 활발히 모이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한인 교회는 2019년 3500여개 교회로 성장했다. 비영리재단 재미한인기독교선교재단(이하 KCMUSA)이 지난 2019년 8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주 지역내 한인교회는 총 3514개다.

캘리포니아주에 1008개로 가장 많고 그 뒤로 뉴욕(280개), 조지아(194개), 텍사스(189개), 일리노이(172개), 워싱턴(166개), 뉴저지(157개), 버지니아(154개) 순으로 파악됐다.

또 미주 지역 전체 한인 인구(145만3671명)를 전체 한인 교회 수(3514개)로 나눈 결과 한인 413명당 1개꼴로 한인 교회가 존재한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미주 한인 교회의 소속 교단 비율을 보면 남침례회(SBC)가 16%로 가장 많았으며, 그 뒤로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11%, 대한예수교장로회(미주합동총회)와 연합감리교(UMC)가 각각 8%로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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