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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 가운데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한국에서 선배님이 올 4월에 출판된 신간을 한권 보내주셨다. 책값보다 3배 많은 우편요금을 물고 보내주신 배보다 배꼽이 컷던 책은 선배님의 지인인 김인식씨가 나이 70에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걸은 체험담을 쓴 ‘자유로운 영혼으로 혼자서 걸었습니다’이다.

책을 선뜻 펼치지 못하고 눈 앞에 두고 오며가며 흥분했다. 세상에 멋진 장소가 많지만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에게 특별해서 한번 더 걸으려고 몇 년째 벼르고 있는 중이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주인인 스페인의 수호성인이자 예수님의 12제자중 한 분이신 제임스 성인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던 참에 받은 이 책은 어쩌면 그 초대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4년 봄에 스페인에 가서 한국에서 온 옛친구를 만나 2주 둘이서 순례길을 걸었다. 그때는 목적없이 집을 떠났다가 뭔가를 가슴에 품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해 가을에 그 뭔가가 영적 성장을 구하는 기도가 되어서 다시 스페인에 갔었다. 혼자서 한달 순례길을 걸으면서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한 사색의 날들을 보냈다. 내 속에 가득한 세상살이를 비우고 내려놓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서 짊어진 배낭에 담았다.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었던 긴 여정 동안 나의 맨 얼굴과 마주섰고 몸과 마음과 영혼이 도전을 받았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아팠었다. 그때 영육에 받은 막대한 영향에 아직도 꽉 잡힌 나는 분명 까미노 병에 걸렸다.

선배님이 보내주신 책을 들었다 내렸다 며칠 주춤이다 방 한쪽에 떠날 준비가 된 모든 필수품이 담긴 배낭을 열었다. 그 안에 숨죽이고 있는 물품들을 모두 꺼내어서 침대 위에 펼쳐놓고 일일이 체크했다. 가끔 이렇게 점검하는 버릇은 벌써 몇 년 째다. 새로 장만한 양말은 헌것과 바꾸고 필요없다고 내놓았던 헤드랜턴은 다시 배낭에 넣었다. 이번에는 상비약은 모두 꺼냈다. 출발하기 전에 새롭게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배낭을 제자리에 두고 나서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프랑스 길의 시작인 프랑스 남부 생장피드포르의 사진에서 시선이 멈췄다. 사진의 바로 그 다리 위에서 나는 현지에서 만난 블랑카와 제임스와 순례를 시작했었다. 그곳에서 피레네산맥을 넘는 시작부터 자유로운 영혼으로 김인식씨가 순례길을 걸어가면 나도 뒤따라 눈에 선한 그 길을 걸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두 발이 묶인 일상에서 익숙해진 가상 현실을 체험하는 것 보다 더 생생했다.

먹고 자고 일어나 다시 걷는, 단순한 똑 같은 일정이지만 매일 색다르고 지나가며 보는 자연 풍광과 만나는 사람들도 매일 달랐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걸으면서 곳곳에서 만나는 십자가의 무게가 힘겨웠다. 김인식씨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회상하는 추억의 단편들을 아름다운 낙엽으로 남긴 것을 나는 바람이 되어 들판에 흩었다. 아름다운 삶의 흔적은 풍성한 가을의 수확이 아닌가. 누군가가 뿌린 믿음의 씨가 누군가의 마음에 싹을 트고 자라는 신의 섭리를 터득하니 오래된 성당의 나무의자가 전혀 딱딱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내 몸과 마음은 분리됐다. 현실에서 내가 무엇을 하든 마음은 계속 순례길을 걸었다. 물소리, 바람소리와 새소리 선명하게 들으면서 기도문을 외웠다. 요가를 하며 황량한 평원을 걸었고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며 작은 마을을 지나갔다. 남편과 대화하며 산비탈길에서 움직이는 작은 돌덩이들을 피해 걸었다. 지나는 길에 있는 성당마다 들러서 감사기도 드렸고 만나는 순례자들과 서로 의지했다. 천연의 이끼로 질척이는 순례길을 걸으면서 오랜 세월 많은 순례자들이 기도하며 흘린 희망을 주운 멋진 수확을 거두었다. 김인식씨의 책, ‘자유로운 영혼으로 혼자서 걸었습니다’가 나의 ‘아름다운 영혼으로 모두와 걸었습니다’가 됐다.

그리고 “순례자나 구도자가 아니고 그냥 자유롭고 싶은 걷는 자” 공언하고 시작한 그가 800km 긴 여정을 마치고 나서 “어느새 걷는 자는 순례자가 되어 있었다”는 마지막 말이 가슴에 깊은 공감을 줬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가톨릭 신자만 아니라 모두에게 신의 현존을 일깨워주는 신비한 파워를 가졌다. 더불어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후배를 잊지않고 늘 기도해주시는 선배님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영 그레이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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