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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먼 남쪽 길

“서울이 함락되기 전날 밤
이층 할아버지는 징집
적령기의 두 아들을 데리고
그토록 그리던 고향 땅에서
더 멀리 남쪽으로 떠났다”

1950년 6월, 첫 포성이 들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집 앞 큰길에 처음 보는 군인들이 나타났다. 미처 피란을 떠나지 못한 우리 집은 그날부터 북한 치하에서 석 달을 지냈다. 아버지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파스와 나이드라지드 등을 자리 옆에 늘어놓아 결핵 환자로 위장했다. 서울 함락 직후 ‘받들어 총’하고 가택수색을 들어왔던 앳돼 보이는 인민군 두 명은 폐병 환자라는 말에 질겁을 하고 수색을 하는 둥 마는 둥 다음 집으로 옮겨 갔다.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법’이 발표되자마자 우리 소유 농지의 대부분을 소작농들에게 헐값에 넘긴 아버지는 ‘악덕 지주’를 겨우 면하고 무사할 수 있었는데 북한군의 군량미 싹쓸이로 서울에선 식량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처음 얼마 동안은 집에 있던 양식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곧 식량이 바닥났다.

아버지는 서울 근교의 농가에 가서 쌀을 조금씩 구해 오셨다. 9.28 서울 수복이 머지않던 그 날도 쌀과 맞바꿀 이런저런 옷감을 준비하며 어머니는 전에 없이 늑장을 피웠다. 아버지는 예정보다 30분쯤 늦게 광나루에 도착했고 그곳은 30분 전 미군의 폭격으로 다리는 부서지고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에 의하면 아버지의 ‘천운 릴레이’는 일본 강점기 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일본 기업에서 촉탁을 지내는 아버지에게까지 징집령이 떨어졌다. 어머니는 가까운 친척과 지인 집에 아버지를 피신시키고 주재소에서 호출이 오면 일부러 어린 나를 업고 가서 볼기를 꼬집어 울리고 또 달래면서 아버지의 소재에 대해 얼버무렸다고 한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 아버지는 원서동에 사는 일본 현직 중의원 집에 피신했는데 그 대가로 우리가 사는 계동 집을 훗날 양도하기로 약속했다. 패전 후 그는 일본으로 달아났고 아버지는 목숨을 구했지만 그 중의원에게 다리를 놨던 둘째 외삼촌의 집요한 요구로 우리 집을 외삼촌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내 태를 묻은 계동 집은 예전에 고종 황제가 아들 이강 공에게 결혼 선물로 지어 준 집이라고 했다. 계동 집을 떠나 쌍림동의 적산가옥으로 이사했고 학예회나 운동회 때 언니들을 따라다니며 나도 입학하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꿈의 재동초등학교 대신 우리 학군인 동대문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집을 빼앗은 외삼촌네는 서울 수복 때 외숙모가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큰 아들을 데리고 감쪽같이 월북해 버렸다. 할머니가 계시는 큰 외삼촌 댁이나 이모들과는 친밀하게 지내면서 막내아들을 데리고 불우하게 지내는 둘째 외삼촌에게는 냉랭하게 대하던 부모님의 집에 얽힌 사연을 먼 훗날에 알았다.

허름하지만 널찍한 적산가옥으로 이사할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북에서 우리 집으로 아버지의 친척들이 대거 몰려오기 시작했다. 2층의 12조 다다미방은 아버지의 육촌 형과 네 자녀가 차지했고 8조 방은 아버지의 당숙과 두 아들이 썼다. 4조 방엔 아버지의 조카, 사촌, 육촌들이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석 달 동안 남한에 정착할 때까지 들락날락했다.

아버지는 이들의 정착을 돕느라 허리가 휘었지만 쌍림동 집의 하루하루는 참으로 버라이어티했다. 언니들은 가끔 왕래는 했지만 이젠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여러 오빠의 먼 대륙 여행기 등을 흥미있게 들었고 그들의 대화에 나도 질세라 끼어 들곤 했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8조 방 할아버지는 대대로 내려오던 문전옥답을 버리고 임진강을 건너온 탱자였다. 하루아침에 ‘인민의 적’으로 몰려 선산과 토지와 물 깊은 고논을 모두 버리고 야음을 틈타 남쪽으로 피신한 대지주였던 할아버지는 이 현실을 당최 믿을 수 없었고 공산당이라면 치를 떨었다. 귤이었던 시절을 못내 그리며 길에서 고향 분을 만나 약주라도 한잔 하신 날은 집안이 떠들썩하게 한을 풀어 놓으셨다.

집안의 모든 재산은 장자인 이층 할아버지네가 물려받았고 지차였던 우리 할아버지 자손들은 각자도생했지만 아버지는 종가의 몰락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 항렬만 높을 뿐 나이는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종손인 당숙을 깍듯이 대했다.

석 달이 지난 9월, 우리에겐 2차 대전 때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사건에 비할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해서 서울은 공산당의 치하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그 지긋지긋한 인사들이 겨울에 또 몰려올 것이라는 믿기 힘든 소문이 돌았다.

6.25전쟁 기간에 ‘미국은 핵을 쓸 의사가 없고 만주를 사수할 계획도 없으며 한반도에서 제한적인 전쟁만 벌일 것’이라는 기밀을 소련과 중공은, 영국 해외 정보기관에서 활약하던 이중 스파이들을 통해 입수했다고 한다. 확전의 염려 없이 그들이 한반도를 마음껏 유린할 수 있었던 이유다.

서울이 함락되기 전날 밤, 이층 할아버지는 징집 적령기의 두 아들을 데리고 그토록 그리던 고향 땅에서 더 멀리 남쪽으로 떠났다. 병약한 당숙모는 8조 방에 남겨둔 채. 그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깊어 질 무렵, 우리도 먼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박 유니스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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