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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맑고 자유로웠던 그때 그 스승

인생을 돌아보면 내게는 좋은 스승이 많았다. 우선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케 한 스승, 붓다를 알게 된 것도 큰 복이요, 은사스님을 만난 것도 큰 복이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이 이제는 노보살이 되어 제자의 법문을 듣고 합장해주니, 40년 가까운 사제 인연 또한 큰 복이다. 오늘은 그 많은 스승 가운데 한 분을 마음속에서 꺼내보고자 한다.

일본 불교학자 가운데 야나기다 세이잔(1921~2006)이라는 선생이 있었다. 생전에는 한국 스님들과 교류도 많았고 특히나 해인사를 좋아하여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해인사로 출가해 팔만대장경을 연구하고 싶다’던 바로 그분!

야나기다 선생은 서양에 불교를 소개한 스즈키 다이세츠(1870~1966)의 선(禪)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자신만의 독자적 견해로 선을 철학적·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해 새로운 선불교 시대를 이끈 세계적 불교석학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대학자에게서 나는 선학을 배운 것이 아니다. 그분이 주도하는 공부모임에 몇 번 참석하긴 했지만, 당시에는 일본어가 서툴러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선생께 감동받은 것은 그분의 고상한 생각과 맑고 간소한 일상생활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부터다.

옛 선승이 이르기를 ‘명리를 좇지 않고 가난을 염려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지금도 눈에 선한 풍경이 하나 있다. 무릎을 꿇고 정좌를 한 노학자, 고개를 살짝 떨구고 상대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는 자세, 겸손한 언행과 다다미 위에 놓인 푸른 말차 한 잔, 빼곡하게 쌓인 책과 집안 가득한 고서와 묵향.

선생 댁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야나기다 선생의 부인은 일본에서도 꽤 유명한 다도 선생이라, 갈 때마다 근사한 다완에 귀한 차를 얻어 마시곤 했다. 그러나 그날은 부인이 외출했다고 해서 ‘그 맛난 차를 오늘은 못 마시겠구나’했는데 내 눈빛을 읽었는지 선생께서 직접 차를 내주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미각이 둔한 것인지, 존경하는 선생이 준비해준 차여서 그런지, 설렁설렁 휘저어 내어준 말차 맛이 기가 막혔다. 다도 선생인 부인이 내준 차보다 훨씬 담백하고 향기로워 깜짝 놀랐다.

왜 이렇게 맛있는 거냐고 여쭈니, 선생은 손을 내저으며 그저 모든 격식을 떠나 대충 만든 자신만의 스타일이라며 미소 지었다. 그래, 그렇지. 어떠한 형식도 격식도 차리지 않아 더욱 차 맛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뭔가를 자꾸만 더해가는 것이 아니라 빼고 내려놓고 비워두어야만 얻을 수 있는 기쁨이란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야나기다 선생의 이름과 책을 접할 때마다 동시에 떠오르는 풍경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선생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담백하고 고상한 침묵 속으로 나를 이끈다. 어쨌든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을 예견하셨는지, 대문 밖에서 멀어져가는 이국의 승려를 하염없이 고개 숙이며 배웅하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다.

평소 어설픈 허영심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비추어볼 때 선생의 모습은 군더더기 없이 맑았다. 학자로서의 이름은 높으나 명리와는 관계없는 듯 초연하게 사는 모습은 더 고귀하였다. 학문 연구뿐만 아니라 차 한 잔 내는 것조차 시간을 가지고 노는 듯 자유롭고 평온한 그 모습. 물론 그분이 젊은 시절 출가자였기에 더 친근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불교에서는 사제지간이 되려면 1만겁의 인연이 필요하다고 한다. 1겁도 아니고 1만겁이라니. 야나기다 선생과는 글쎄…. 그 정도의 인연은 아니겠지. 그러나 그분이 준 영향은 분명하다. 선생처럼 고아하게 살지는 못하지만 그분 덕분에 세속적 가치에 물들지 않고도 인간은 스스로 존엄하게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원 영 스님 / 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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