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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젤라 오] 왜곡된 한인 이미지 바로잡으려 동분서주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5화> '한인사회의 대변인' 앤젤라 오 변호사
<4> 숙명이 된 대변인 역할

백악관 인종자문위원회로 임명된 앤젤라 오 변호사(맨 오른쪽)가 에어포스원에서 진행된 회의에 참석한 모습. [앤젤라 오 변호사 제공]

백악관 인종자문위원회로 임명된 앤젤라 오 변호사(맨 오른쪽)가 에어포스원에서 진행된 회의에 참석한 모습. [앤젤라 오 변호사 제공]

빌 클린턴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한 앤젤라 오 변호사. [앤젤라 오 변호사 제공]

빌 클린턴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한 앤젤라 오 변호사. [앤젤라 오 변호사 제공]

흑인문화 몰라 한인 업주들 피해
소수계 판사 배출 노력에도 총력


▶문화 차이가 범죄 부르다

주류 방송에 출연한 후 나의 ‘대변인’ 역할에 대한 한인사회의 비난이 적지 않게 쏟아졌고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주류 방송국에서 내게 듣고 싶어하는 건 하나였다. 바로 LA 폭동을 보는 한인 피해자들의 시각과 생각이었다. 영어가 완벽한 한인 1세들을 찾을 수도 없고 있어도 나서지 않으니 영어권인 2세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내가 나섰지만 2세이기에, 이민 1세들과 생각의 차이는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

한인 1세와 가장 큰 차이점은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인식이다. 당시 흑인 커뮤니티에서 장사하던 한인 업소에는 약탈과 절도가 빈번했다. 업소를 지키다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한 한인들은 셀 수 없다. 하지만 그 뒤엔 흑인사회의 문화를 잘 몰랐던 이유도 있었다.



당시엔 거리를 돌아다니는 갱들도 많았고 라이벌 갱단 간의 싸움과 총격전도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입는 옷의 색상조차도 조심해야 했다. 예를 들어 히스패닉 갱단원들은 흰색 티셔츠에 배기바지, 얇은 벨트를 하고 다녔다. ‘크립스’로 불리던 흑인 갱단원들은 파란색이나 검은색 옷을 아래위로 맞춰 입고 다녔고, ‘블러드’ 갱단원들에게는 빨간색이 상징이었다. 반면 한인들에게 흰색과 파란색, 빨간색은 한국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이 때문에 갱단원들이 업소를 방문했다가 업주의 옷 색깔 등을 보고 라이벌 갱단을 지지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90년대 흑인 커뮤니티는 지금보다 경제적 사정이 더 나빴다. 신선한 야채를 사려면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할 만큼 주거환경과 기반시설이 취약했다. 하지만 당시 한인들은 현금을 갖고 다녔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다녔다. ‘너희보다 낫다’는 모습을 보여준 한인들은 그래서 쉽게 범죄의 타깃이 됐다. 그러나 한인들의 삶을 제대로 보도하는 주류 언론은 거의 없었다.

▶소수계 판사 확대 추진

폭동으로 한인 사회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지원은 말 뿐이었다. 민권위원회 모임에서 만난 정부 인사들은 “관련 문제를 연구하겠다”고만 했다. 무책임한 발언이었다. 수십 명이 죽고, 사업체들은 약탈을 당하고, 인종 관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지만, 구체적인 행동은 보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현재와 달리 흑인 커뮤니티에 이익을 환원하거나 협력 관계를 맺으려는 1세들도 거의 없었다. 사회환원이나 후원, 네트워크 등에 대한 미국식 사회시스템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LA시를 재건축하자고 제안했다. 갱단원들이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갱생 프로그램을 도왔고 인종 간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또 한인 비영리 단체들과 함께 비한인들을 돕는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방송을 통해, 기사를 통해 이런 생각과 프로그램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함께 하자는 연락이 왔다. 다인종 인권단체 및 법률 단체들이 행사의 스피커로 초대했다. 아시안 커뮤니티와 파트너십이 필요한 정계에서도 손짓했다. LA시 위기대응위원회 특별검사로 임명됐으며, LA시 인종위원회, 캘리포니아 주 검찰청, 연방 법무부 인권국, 백악관의 초청을 받았다.

1986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재판 때문에 법원을 드나들 때마다 아쉬웠던 점은 아시안 판사의 부족이었다. LA카운티 법원에서 한인은 고사하고 아시아계 판사를 마주칠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캘리포니아 주 검찰청에서 커미셔너로 임명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소수계 판사 채용 기회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수계 판사 1명을 임명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가주 검찰청, 주 상원 법사위원회, 주지사 사무실 등 관련 부처들과 끊임없이 만나고 의견을 개진하는 미팅의 연속이었다. 1998년 피트 윌슨 주지사는 LA카운티 지방법원(현 수피리어법원) 판사로 마크 김 씨를 임명했다. 당시 남가주에 한인 판사는 그가 유일했다. 한인사회에 오랜만에 가져다준 기쁜 소식이었다.

▶백악관 자문위원이 되다

백악관과 감옥의 공통점이 있다. 출입구에 24시간 경비원이 있고 감시카메라가 있다는 점이다. 1997년 LA 폭동 5주년을 맞아 LA의 폭동피해 현장을 찾은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해 6월 대통령 직속의 인종자문위원회를 설치했다. 자문위원에는 나를 포함해 총 7명이 위촉됐다. 나는 2~3개월마다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해 한흑갈등만이 아니라 미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인종 간 갈등 문제를 알리고 이를 근절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또한 연방 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에 민간 컨설턴트로 참여해 고용 차별이나 괴롭힘을 당했다고 접수되는 사건을 모니터하고 자문했다.

이 밖에도 연방상원의원 바버라 복서의 연방 판사지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돼 연방 중부지법 판사 후보자들을 평가하는 책임을 3년간 맡았으며, 캘리포니아여성법률센터 이사, 연방 제9 순회법원콘퍼런스 변호사 대표, 가주사법이용위원회 커미셔너 등을 맡았다.

그곳에서 내 역할은 인종갈등을 중재하고 이를 근절하기 위해 법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무엇보다 주류사회가 가진 한인에 대한 이미지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한인 법조계 역사

미국에서 한인 판사가 가장 많은 곳은 LA카운티 수피리어 법원이다. 1998년 마크 김 판사(롱비치)를 시작으로 2002년 한인 첫 여성 판사로 임명된 테미 정 류 판사(캄튼 청소년 법원), 2003년과 2006년 각각 임명돼 앤틸롭 법원에서 함께 근무하는 리사 정 판사와 찰스 정 판사가 있다.

북가주에는 2006년 새크라멘토 카운티 법원의 헬레나 권 판사가, 2008년에는 샌타클라라 카운티 법원에 루시 고 판사가 임명됐다. 고 판사는 2010년 샌프란시스코 연방 지법 판사로 임명됐으며, 2016년에 제9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하와이 주에도 한인 판사가 다수 배출됐다. 지난 2010년 은퇴한 로널드 문 하와이 주 대법원장, 연방순회법원에 캐런 안 판사와 게리 장 판사, 글렌 J. 김 판사 등이다.

동부지역에도 다수 있다. 지난 2002년 메릴랜드 주에서 브라이언 김 판사와 지니 홍 판사가 탄생했다. 뉴욕주의 경우 1999년 뉴욕시 형사법원 판사로 임명된 전경배 판사에 이어 2005년 장애를 이겨내고 같은 법원의 판사로 임명된 정범진 판사가 있다. 전 판사와 정 판사는 모두 뉴욕시 검찰청과 뉴욕 브루클린 검찰청을 거친 검사 출신이다.

선거를 통한 진출도 늘었다.

네바다주 노스 라스베이거스 제3선거구 판사직에 출마해 당선된 이기숭 판사가 있으며 LA카운티에서도 앤 박 판사, 수잔 정 판사, 토니 정 판사 등이 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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