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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삶의 균열

“몇 차례의 지진으로
생긴 균열이라는 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집이 앓고 있었다”

집을 수리하는 중이다. 오래돼 얼룩지고 이리저리 밀리는 카펫을 걷어내고 마루로 바닥을 바꾸는 공사다. 이왕 시작했으니 벽에 페인트를 칠하자는 결론을 냈다. 인부들이 큰 가구를 옮기고 먼지 속에서 일했다. 앞마당에 쌓인 더러운 카펫과 스펀지와 그 밑에 깔려 있던 타일이 그들이 열심히 일한 양을 말해줬다.

남편과 나는 들락날락하며 점심 식사와 간식 그리고 음료수를 챙겼다. 거실과 복도는 내가 며칠 전까지 지낸 곳이라고 믿어지지 않게 낯설었다. 그동안 장식장과 액자가 걸렸던 벽에는 거미줄이 이리저리 당당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무엇을 그린 건지, 누가 한 낙서인지 한쪽 귀퉁이가 지저분했다.

목수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벽에 가는 틈이 길게 가로로 줄을 긋고 있다. 그보다 심각한 상태는 바닥이 갈라지고 어긋나며 얕은 턱이 생겼다. 벽은 가구가, 바닥은 스펀지와 카펫으로 가려져 눈에 띄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기에 당황했다. 그동안 몇 차례의 지진으로 생긴 균열이라는 말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집이 앓고 있었다. 미세한 균열이 벽의 이곳저곳을 상처 내고, 예기치 않은 땅의 흔들림에 거부할 수 없이 밀려 골절된 듯 상처를 입었다. 겉모습은 멀쩡한데 그 안은 골병이 들었구나. 아예 부서지거나 구멍이 났다면 눈에 보이니 바로 수리를 했을 텐데 방치되었다.

내 속을 뒤집어 본 듯하다. 살면서 많은 상처를 받는다. 상대가 무심코 지나치며 하는 말 한마디가 가시로 박힐 때가 있다. 남들은 그냥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상황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상처가 되고, 미미한 아픔을 주고 지나간 흔적이 문득문득 아려올 때도 있다. 상황에 따라, 상대가 누구인가로 깊이를 측정하는 척도가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안으로 삭히며 ‘좋은 게 좋다. 나만 참으면’이라는 생각으로 지낼 때가 많다.

상대의 탓도 있지만 내 안에서 있는 또 다른 나와의 줄다리기는 견디기 힘들다. 물에 물 탄 듯 맺고 자르지 못하는 성격 탓에 ‘왜 딱 부러지고 확실하지 못했을까. 이랬으면 더욱더 좋았을 것’ 이미 늦은 걸 알면서도 돌아서서 자책하고 후회하며 기억의 끄트머리에 꽂아 놓고 두고두고 곱씹는다. 속앓이 하는 동안 내 몸과 정신은 골병 드는 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어제 일만 해도 그렇다. 새크라멘토에 사는 시누이가 멕시코의 집에 2년 동안 못 가봐서 걱정되니 함께 가자고 했다. 머릿속이 하얘지며 잠시 말문이 막혔다. 8시간 운전하고 가야 하는 데 자동차에 기름 넣고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최소 서너 번은 공공시설을 이용해야 한다. 더구나 여든 살이 넘은 그녀가 운전하는 차의 옆좌석은 가시방석을 넘어 고문이 되리라.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용기를 내서 말했다. 아직 백신을 맞지 않아서 장거리를 가는 일은 불편하고 만약 다녀오면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데 이미 의사와의 약속이 두 번이나 정해져 있어 곤란하다는 이유를 댔다.

힘겹게 개미 목소리로 거절했다. 팬데믹이 아니었으면 당연히 갔을 텐데, 결혼 후 처음으로 “No”라고 말했다. 당장은 아니고 다음 달이라도 형편 되는 대로 날짜를 조절하자며 시누이는 반쯤 후퇴를 했다. 그녀의 잔뜩 기대했다가 시무룩해진 목소리가 온종일 귀 안을 맴돌았다. 혹시 혼자 가다가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나, 사고라도 나면 큰일인데. 걱정돼서 밤에 잠을 설쳤다. 간다고, 알았다고 흔쾌히 답해주지 못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전화해서 간다고 해야 하나, 몇 번을 망설였다. 남편은 잘한 결정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본인에게 말했으면 안 된다고 할 것을 아니 마음 약한 당신을 택했다며 혀를 끌끌 찼다. 거절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나. 누나도 섭섭한 마음은 잠깐이고 요즘 상황이 이러니 곧 이해할 거라는 말로 용기를 주었다.

벽에 난 균열이 내 마음의 상처 같고, 층진 바닥은 내 머릿속 같다. 나도 대대적인 수리를 해야지 그냥 두었다가는 겉은 멀쩡해도 속은 상처가 곪아 터지기 전까지 깨닫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을 달래고 치유하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마음의 눈을 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내려오면서 긴장의 끈을 내려놓자.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는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본인을 향한 잣대가 느슨해지리라. 지나간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비우는 연습도 필요하다. 이미 ‘상황 끝’인데 혼자 끌탕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아닌 일은 못 한다고 똑 부러지게 대답하고, 하기로 했으면 후회하지 말자.

균열이 더 깊어지고 퍼지지 않게 이제부터라도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덜어내고 비우자.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처를 다스리면 되겠지. 자존감이 높아지면 주위에 따스함을 나눌 여유가 생기니 나를 중심에 두고 살자.

남편과 목수인 레이는 수리할 방법을 의논했다. 공사가 예상했던 기간보다 길어지고 비용도 생각보다 더 들지만 시작한 일이니 마무리는 지어야 한다. 페인트 색을 고르라며 샘플을 내민다. 환하고 포근한 색으로 해야지. 깔끔해진 집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사는 내 모습을 그려 본다.


이현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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