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앤젤라 오] 수수방관 경찰…생활터전 지키려 총 들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5화> '한인사회의 대변인' 앤젤라 오 변호사
<2> 시민소요 아닌 폭동

1992년 5월 6일 LA한인타운의 서울국제공원에서 LA 폭동 당시 폭도로 오인당해 총격을 받고 목숨을 잃은 이재성 군의 장례식이 있었다. [중앙 포토]

1992년 5월 6일 LA한인타운의 서울국제공원에서 LA 폭동 당시 폭도로 오인당해 총격을 받고 목숨을 잃은 이재성 군의 장례식이 있었다. [중앙 포토]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앤젤라 오 변호사가 휴대폰으로 통화하고 있다. [앤젤라 오 변호사 제공]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앤젤라 오 변호사가 휴대폰으로 통화하고 있다. [앤젤라 오 변호사 제공]

흑인변협과 기자회견 준비했지만
주류 언론들 외면으로 보도 안돼


‘폭동(Riot)’의 사전적 의미는 ‘다수의 사람이 결합해 집단적 폭력 행위를 일으켜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일’이다. LA시는 1992년 4월 29일을 ‘시민소요(Civil Unrest)’가 일어난 날로 칭한다. 하지만 그날의 사태는 소요가 아닌 폭동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TV를 켰다. 자정이 다가오고 있지만 한인 스왑밋 건물의 불길은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불길이 솟구치는 건물은 늘어났다. 새벽이 다가오자 약탈이 시작됐다. 약탈꾼들이 불이 난 건물 주위 상점들을 부수고 들어가 물건을 훔쳐 나오는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밤새워 지켜본 화면 속 LA는 ‘혼돈’ 그 자체였다.

▶4월 30일 둘째 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옷을 차려입고 존 임 변호사를 만나러 나섰다. 임 변호사는 그해 한인변호사협회(KABA) 회장이었고 나는 차기 회장으로 선출됐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한인 커뮤니티에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폭동이 발생한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았지만,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한 상점과 건물들이 19곳으로 늘었다. 폭도들의 규모는 경찰들이 진압할 수 없을 만큼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사우스 LA를 지나 한인타운을 향했고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상점 유리창들은 깨지고 약탈행위가 이뤄졌다.

▶텅 빈 기자회견장

임 회장의 사무실에 한둘씩 동료들이 모였다. 회의에서 흑인변호사협회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모두 찬성했다. 90년대만 해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활동하던 유색인종들은 많지 않아 서로 가깝게 지내왔다. 흑인변호사협회도 한인들과 가까웠다. 당장 연락을 취하자 그쪽에서도 필요성을 절감하며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기자회견장은 올림픽과 플라워에 있는 아태법률센터(현 아시안아메리칸정의진흥협회) 콘퍼런스룸을 빌리기로 했다. 아태법률센터 설립자는 중국계인 스튜어트 쿼 변호사다. 그때만 해도 콘퍼런스룸까지 있는 사무실을 갖고 있는 아시안 법조인은 거의 없었다. 쿼 대표는 흔쾌히 사무실을 빌려주기로 했고 기자회견 내용과 관련해 이것저것 조언도 했다. 우리는 흑인변호사협회와 공동으로 보도자료를 만들어 주류언론사들에 뿌렸다.

임 회장과 나, KABA 회원들과 당시 흑인변호사협회장이었던 레이철 영 변호사와 마울라 얄랴 부회장 등 흑인 변호사들이 기자회견 시간에 맞춰 회견장에 속속 도착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무리 기다려도 기자들은 오지 않았다. 모두 폭동 현장으로 몰려간 것이다.

10분 정도 기다리다 실망한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차를 몰고 한인타운으로 향했다. 한인타운에는 약탈과 방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폭도 무리에는 흑인들뿐만 아니라 히스패닉들도 보였다. 그들은 상점에서 기저귀, 우유, 빵 등을 꺼내와 도망쳤다.

흑인들은 거리의 옷가게에서 옷들을 대량으로 훔쳐 뛰어갔다. TV와 운동화 등을 훔쳐 달아나는 폭도들도 곳곳에 보였다. 그들은 심지어 웃음까지 보이며 걸어갔다. 차량을 몰고와 약탈한 물건들을 싣고 가는 약탈꾼도 보였다.

하지만 화재와 약탈 현장에 경찰은 없었다. 경찰을 태운 차량은 사이렌을 켜고 폭도들 옆을 쏜살같이 지나갈 뿐이었다. 방화와 약탈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순찰차를 세우고 지켜보는 경찰들을 본 한 한인 업주가 물건을 훔쳐가는 폭도들을 가리키며 도와달라고 달려갔지만,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니 분노가 일어났다. 경찰들이 없는 한인타운은 무법천지였다. 결국 오후가 되자 피트 윌슨 당시 가주 주지사는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주 방위군을 투입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한인 사망 소식에 분노

당시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없었다. 상대방에게 연락하려면 호출기에 번호를 입력해 알리는 방법뿐이었다. 휴대폰이 있기는 했지만 위성 전화 시스템이라 매우 커서 실제로 들고 다니기가 어려웠다. 그때 나는 회사에서 받은 업무용 휴대폰을 차 안에 갖고 다녔다. 그런데 그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폭도들이 가게를 침입했을 때 총을 쏴도 되는지 가주법에 관해 묻는 한인 고객이었다. 이 업주는 “이곳은 내 가게다. 폭도들의 약탈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한인에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묻자 한국어로 나오는 라디오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총을 들고 대응하는 건 위험하며 불법 총기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 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동료 변호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알고 보니 약탈과 방화를 두고 보지 못하겠다고 결심한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생활터전을 지키겠다고 가게에 총을 들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가게 문 앞에서 총을 들고 지킨다고 했다.

ABC-TV, NBC-TV 등 주요 언론들이 총을 들고 가게를 지키는 한인들의 모습을 취재했다. 폭도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모습도 보여줬다. 그러다 한인 청년이 폭도로 오인당하여 사망했다는 참담한 뉴스가 나왔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때 그 사건

LAPD 기록에 따르면 92년 폭동 당시 목숨을 잃은 시민은 55명, 부상자는 2383명이다. 한인 사망자는 샌타모니카 칼리지에 재학 중이던 이재성(영어명 에드워드) 군이 유일하다. 그는 한인타운 곳곳이 불에 타자 친구들과 함께 한인업소를 지키려고 나갔다가 오인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이군은 3가와 호바트 코너에서 폭도들과 경찰 간의 총격전 와중에 머리에 총탄을 맞아 숨졌다. 이군은 당시 위험하니 집 안에 있으라는 부모의 간청에 “한인들과 한인사회가 내 도움이 필요하고 있다”며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군의 사망 소식이 나온 후 한인타운은 폭도들에 대응하는 총기사용을 자제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또 한인사회는 주류사회에 폭동 종식을 호소하는 평화행진을 벌였다. 당시 평화행진에는 3만 명의 한인들이 참가한 것으로 기록됐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