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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꽃나무의 인생 수정

“자코메티 조각인가?”

첫새벽에 걸으러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막대기처럼 날씬하다. 그들의 균일하고 규칙적인 다리 동작은 마치 조각이 걷는 듯하다. 새벽과 아침 사이, 사물이 확실하지 않은 그 시간, 나의 창밖 풍경이다. 30초 후면 사라지고 다른 조각이 등장한다. 매일 보는 익숙한 장면이다.

사월 중순경, 창문 밖 세상에 변화가 왔다. 내가 못 가본 무릉도원이 이럴까? 잠에서 걸어 나온 나는 초현실 같은 나무에 넋을 잃는다. 빳빳한 핑크 마분지 같은 꽃이 나무를 뒤덮고 있다.

“핑크 핫 핑크의 절정!”



내가 아는 형용사를 소리 내 보지만, 어느 것도 빙고! 하는 정답이 아니다. 내 말을 가져다 붙이면 그저 그런 나무가 된다. 적당한 말을 찾지도 못했는데어느새 오월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꽃의 모습이 달라졌다. 이집트조각 같던 그들이 나른해지면서, 공단같이 탱탱하던 색도 흐려졌다. 2주 사이에 달라진 도그 우드 나무(dog wood)의 모습이 가슴 한켠을 찌른다. 알 수 없는 한숨이 나온다. 이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최근에 읽은 소설 탓일지도 모른다. 중서부에 사는 미국인 가족의 이야기지만, 어디선가 보고 들은 것처럼 친숙했다. 아내를 무시하는 가장, 자식에게 집착하는 어머니, 늙은 부모가 부담스러운 자녀. 특히 가장 알프레드의 모습이 한국인 아버지와 비슷했다. 무표정하고 웃을 줄 모르고 지나치게 일만 한다. 아내에게 다정한 적도 없고, 아이들에게도 군대 상관처럼 엄격하다. 그에게 세상은 감옥 같은 곳이고, 고통은 당연하므로 질문해서는 안 된다. 음울함이 뿜어내는 독성으로 뇌관이 서서히 망가졌는지, 은퇴하자 파킨슨병과 치매가 시작되었다. 오즈의 마법사 같던 아버지가 지푸라기 노인네가 된 것에 자식들은 충격을 받는다.

작가 조너슨 프랜슨은 이 소설 제목을 ‘Correction(인생수정)’이라고 붙였다. 경제학에서 상향하던 주식이 갑자기 하향하는 현상을 코렉션이라고 부른다. 시장이 저절로 알아서 조정한다는 의미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인생도 저절로 수정되는 시점이 있다. 노년이란 짐승이 웅크리고 있다가 서서히 나타나서 나를 배신할 때, 아무리 거부해도, 고공행진 하던 내 인생이 내려올 수밖에 없다. 알프레드에게 사랑은 멀찌감치 두는 것이었다.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데 가족이 느낄 방법이 있을까. 그가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면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꽃을 보면서 조마조마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저 꽃도 어느 시점에 코렉션을 시작할 텐데 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2주 후에 흐릿한 핑크로 하향의 조짐이 나타났다. 노년의 알프레드가 그랬듯이, 꽃잎은 흐물거리는 파충류처럼 땅에 떨어질 것이다. 살짝 가슴이 아팠지만, 그 생각은 다른 생각을 불러왔다. 알프레드처럼 비관적으로 회의적으로 세상을 살면, 노년이라는 짐승이 더욱 세력을 떨칠지도 모른다. 꽃잎이 떨어지면 어떤가. 지르밟고 걸으면 되지. 파란 잎이 돋으면 시원한 여름을 즐기면 되지. 아침 하늘이 창으로 가득 들어온다.


김미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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