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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거리 천사와 홈리스 남편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한국 여자가 다가와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
남편의 손에 쥐어 주고는
황급히 떠났다고 했다”

세월은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상도 바뀌고 사람의 외모와 사회적 신분도 변한다. 코로나 속에서도 계절은 다시 돌아오고 봄꽃도 활짝 폈지만 좋았던 젊은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3월의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치과 약속이 있어서 한인타운에 위치한 병원에 가는데 남편이 따라 나섰다. 집에만 있으니 무료하고 답답했던 모양이다. 병원은 30여 년 전 남편이 근무하던 건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내가 치료받는 동안 남편은 빌딩 1층에 있는 조그만 카페에서 커피를 시켜 건물 밖 패티오 테이블에 앉아서 봄기운을 즐기고 있었다.

치료가 끝나 집에 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말했다. “참 이상한 여자도 다 봤어.” “왜요?” 라고 물으니 황당한 일을 당했다고 했다. 커피를 마시고 난 후 멍하니 그냥 앉아 있기가 무료해서 운동 삼아 자기가 옛날에 다니던 회사 빌딩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앞에서 오던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한국 여자가 다가와 자신의 배를 손으로 두드리며 “배고파? 배고파?” 하더니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 남편의 손에 쥐어 주고는 황급히 떠났다고 했다. 뭔가 하고 봤더니 깨끗한 10불짜리 지폐를 반으로 접은 돈이었다며 내게 보여줬다. 그걸 왜 받았냐고 하니 얼떨결에 당한 일인 데다가 빨리 쫓아갈 수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편은 최근 발바닥이 아파서 잘 걷지를 못한다.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족저근막염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가 한 달 전쯤 백신을 맞으러 LA에 왔다.

그날은 허름한 캐주얼 복장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착용했다. 마스크를 썼지만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얼굴에 턱수염이 나와서 깔끔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발바닥이 아파 허리를 굽히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으니 그 여자가 보기엔 영락없는 노숙자였을 것이다.

남편을 외국 사람이라고 여겼던지 한국말을 못 알아들을까봐 자기 배를 두드리며 배고프면 밥을 사 먹으라고 10불을 줬을 것이다. 나는 남편이 길에서 그런 대접을 받은 것이 어이가 없고 속이 상해서 “자기가 발이 아픈 것이지 허리가 아픈 게 아니니 앞으론 허리를 쭉 펴고 꼿꼿하게 걸으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남편은 한창 전성기의 옛 추억을 더듬어 가며 그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 건물 안에서 수많은 직원들과 함께 쌓았던 젊은 날의 기억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지금의 처지를 생각하며 우울했을 것이다. 나이 들어 마땅히 할 일도 없고 건강도 안 좋고 앞날에 대해 기대할 것도 별로 없고…. 발병까지 나서 마음껏 걷지도 못하니 그 심정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그러니 가슴이 아리더라도 아무 말도 말았어야 했는데 그만 그렇게 독하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 당당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나이 들어 한없이 무기력해진 남편을 보며 젊은 시절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 ‘초원의 빛’의 마지막 장면과 오버랩 됐다. 빛나는 청춘 남녀가 격렬한 첫사랑의 홍역을 치른 뒤 해후하는 장면이다. 한 때는 그렇게 멋있었던 사랑했던 남자가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고 너무나 초라하게 변한 모습에 여자는 허무함을 느낀다. 그때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가 흐른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은 들 어떠리.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남아 있는 것에서 힘을 찾으리.”

시를 상기하며 남편 때문에 아팠던 마음을 달랬다. ‘빛나는 청춘’이라고 말들 하지만 난 젊어서 한번도 빛나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신감 부족으로 늘 열등감과 소외감으로 괴로워했다. 딱히 내가 뭐를 갖추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모르고 그 이상의 것을 탐해서였다.

이제 노년에 들어서니 세상 일이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포기할 줄도, 내려놓을 줄도 알게 되니 마음이 한결 가쁜하다.

소설가 박경리씨는 운명하기 몇 달 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시 젊어 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씨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고 한다. 청춘의 막막함과 방황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헬렌 켈러의 ‘3일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수필은 우리가 무심코 살아가는 매 순간이 얼마나 기적 같은 것임을 일깨워준다. 젊어서는 햇빛, 공기, 바람처럼 중요한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살았다. 당연한 것으로 누리고 살면서 감사해 본 적이 없다. 시간이 흐르며 모나고 날 선 것들이 둥글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던 소중한 것들이 차츰 보이기 시작한다. 가족이 보이고 이웃이 보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이다. 젊은 날 느끼지 못한 인생의 깊이를 늙어서야 깨닫게 된다. 젊은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은들 어떠하리.


배광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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