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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젤라 오] TV뉴스 속 한인 스왑밋 불길이 폭동의 시작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5화> '한인사회의 대변인' 앤젤라 오 변호사
<1> 플로이드 얼굴에서 데자뷔를 보다

1992년 4월 29일 발생한 LA폭동으로 가게를 잃은 한인 업주가 전소된 건물을 쳐다보고 있다. [중앙포토]

1992년 4월 29일 발생한 LA폭동으로 가게를 잃은 한인 업주가 전소된 건물을 쳐다보고 있다. [중앙포토]

경찰차·소방차 사이렌
"집에서 나오지 마세요"


2020년 5월 25일. “숨을 쉴 수가 없다. 살려달라.” 아스팔트 바닥에 얼굴이 짓눌려진 채 외치는 흑인과 그의 목을 무릎으로 누르며 웃고 있는 백인 경찰의 얼굴을 보여주는 동영상이 페이스북 링크와 이메일로 계속 날아왔다. 이상하다. 데자뷔를 보는 것 같다. TV 리모콘을 찾아 뉴스 채널을 틀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든 뉴스 채널이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파우더 호른의 한 거리에서 발생한 사건 장면을 반복해 보여주고 있었다. 뉴스 속 영상에는 고통스럽게 죽어간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얼굴과 신음과 절규를 무시한 채 계속 그의 목을 무릎으로 찍어 누르며 동료들을 향해 웃는 백인 경찰 데릭 쇼빈의 얼굴이 클로즈업돼 있었다.

방송 기자들은 그가 이용한 식당에서 위조지폐 사용이 의심된다는 신고가 접수되자 출동한 경찰들이 자신의 차에 앉아 있던 플로이드를 내리게 한 뒤 땅바닥에 눕히고 수갑을 채우고 반항도 하지 않은 그의 목을 눌러 질식시켰다고 반복적으로 보도했다.

한참 동안 뉴스를 보다가 TV를 껐다. ‘또 폭동이 일어나겠구나.’ 직감이 들었다. 앤젤라 오 변호사의 머릿속은 29년 전 4월 29일의 기억 속으로 떠나고 있었다.



#여전히 뚜렷한 4·29의 기억

그날 스케줄은 조금 빠듯했다.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맡고 있던 의뢰인의 보석 석방 신청 마감일이 다가와 관계기관에 계속 전화를 했지만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아 마음이 급했다. 의뢰인은 오랫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린 피해자였다. 주먹을 휘두르던 가해자를 죽이고 경찰에 체포된 그녀는 삶을 자포자기하고 있었기에 더 마음이 쓰였다.

게다가 그날 오후에는 유대인 커뮤니티가 주관하는 차세대 리더 교육 프로그램의 강사로 초빙돼 참석해야 했다. 당시 LA는 커뮤니티 간에 왕래가 거의 없었다. 차이나타운, 리틀도쿄, 코리아타운, 웨스트LA, 사우스LA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때 유대인 커뮤니티가 나서서 한인 커뮤니티와의 교류를 시도한 것이다. 한인변호사협회(KABA) 수석 부회장으로 활동했던 나는 수개월 전부터 행사의 의도를 설명하며 한인 커뮤니티를 초청한 유대인 관계자에게 행사 장소로 한인타운의 한식당으로 추천했는데 의외로 좋아했다. 그래서 이 행사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강연을 마치면 사우스LA에 있는 흑인 커뮤니티의 대표적인 교회 ‘퍼스트AME 교회’에 달려가 흑인 리더들과 간단한 미팅을 하기로 약속했었다. 당시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다인종위원회에서 두순자 사건 이후 참석을 권유한 것이다.

다행히 보석신청 마감 시간 직전 집행 당국의 허가를 받아 의뢰인도 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게 됐다. 가벼운 마음으로 로펌 사무실을 떠났다.

LA다운타운에 있는 사무실을 떠나 차를 운전하고 오면서 라디오를 켰다. 그런데 앵커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무죄, 무죄, 무죄. 불일치 배심(Hung jury).” 로드니 킹을 폭행한 4명의 경찰관이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는 판결 내용이 반복됐다. 두순자 이름이 흘러 나왔다. 서둘러 행사장을 찾았다.

식당에 들어서니 모임은 이미 시작됐다. 한식을 소개하면서 인종간 단합을 얘기하려던 주제는 판결 소식을 들은 참석자들의 두씨 사건에 대한 질문이 주를 이었다. 강연을 끝내고 양해를 얻어 먼저 식당을 나서는 데 한쪽 벽에 설치된 TV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속보’라는 커다란 글자 뒤로 깜깜한 화면 속에 불길이 치솟는 건물이 보였다. 위치가 낯설지 않았다. 한인 업주들이 대부분이었던 스왑밋 건물이었다. 식당 내부가 술렁거렸다. 손님들은 식사를 중단하고 TV뉴스에 집중했다. 오후 8시쯤 됐을까. 컴컴한 거리에 경찰차와 소방차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뉴스에서 가능한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안내가 나오기 시작했다. 식당 손님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퍼스트AME 교회에 가려던 계획은 포기해야 했다. LA폭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때 그 사건

LA폭동을 일으킨 원인으로 꼽히는 두순자 사건과 로드니 킹 사건은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다.

로드니 킹 사건은 1991년 3월 3일에 일어났다. LA경찰국(LAPD) 소속 백인 경찰관 4명이 과속으로 프리웨이를 달리던 27세 흑인 청년인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사건이다. 이날 자정쯤 LA 근교인시미밸리 210번 프리웨이를 과속으로 달리던 현대 승용차를 5∼6대의 경찰차가 뒤쫓은 끝에 멈춰 세웠다. 백인 경찰관들은 그 차를 음주하고 운전한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끌어내려 경찰봉과 주먹, 발길질로 구타했다. 구타 장면은 근처 아파트에서 한 시민이 녹화했고 이 녹화 테이프는 방송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두순자 사건은 로드니 킹 사건 발생 13일 뒤인 3월 16일 일어났다. 사우스LA에서 리커스토어를 운영하던 두씨가 15세 흑인 소녀인 라타샤 할린스를 오렌지 주스 절도범으로 오인해 권총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배심원 재판은 두씨에게 2급 살인으로 유죄를 평결했다. 그러나 법원은 재범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고 우발적인 점을 들어 징역형 대신 400시간의 사회봉사 활동 명령과 함께 집행유예 판결(5년)을 선고했다. 두씨는 벌금 500달러와 라타샤의 장례식에 관련된 모든 비용도 지불했다. 두씨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분노한 흑인들이 케이스를 맡은 백인 판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법원 앞에서 벌이기도 하고 항소도 제기했으나 기각됐다.

그러던 중 로드니 킹 구타에 가담한 경찰관 4명이 배심원 재판에서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사 평결을 받은 것이다. 이 재판의 경우 백인 지역인 시미밸리 법원에서 진행됐는데 12명의 배심원 중에서 백인이 10명이었고, 히스패닉과 아시안이 각각 1명이었다. 배심원들의 무죄 판결은 1992년 4월 29일 오후 3시 20분 TV와 라디오를 통해 즉각 발표됐고 LA시장이었던 흑인 톰 브래들리는 “믿을 수 없는 결과”라며 분노했다.

판결이 나온 후 흑인들은 사우스LA 거리로 뛰쳐나와 달리는 트럭에서 백인 운전사를 끌어내려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 장면은 그대로 TV로 방영됐고 약탈과 방화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됐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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