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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을 미국내 소수계 아닌 타국민 인식"

기획:'아시안 증오범죄' 왜 느나-<2> 박계영 교수에게 듣는 역사와 해법
일본·중국 부상에 20세기 중반 국가 차원 적대감
최근 중산층·소수계도 가담…유대 강화 급선무

아시안 증오범죄가 고개를 든 것은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다. 트럼프 정부가 중국 책임론을 밀어붙이면서, 애꿎은 모든 아시안에게 화살이 날아왔다.

하지만 코로나 확산이 아시안 증오범죄의 시작은 아니다. UCLA 박계영 인류학 및 아시아계 미국인학 교수는 “미국 역사에 내재한 아시안에 대한 오랜 적대감과 이질감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분석했다. 아시안 증오범죄의 배경과 원인은 무엇일까. 박 교수에게 들었다.

가해자 대부분이 백인

먼저 박 교수는 아시안 증오범죄의 가해자 대부분이 백인 우월주의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실제로 데이터를 보면 백인 가해자들이 제일 많다. 지난달 애틀랜타 총격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단순히 정신이 이상한 개인의 과격 행동이 아니다.”



박 교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구성원도 과거에는 백인 노동자층이 주를 이뤘지만 이젠 중산층도 많이 가입했고, 심지어 흑인, 라티노 등 소수민족까지 가담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시안 증오범죄 가해자 모두가 백인 우월자라 보긴 힘들지만 백인이 우월하다는 사상에 젖은 이들이 많다”라면서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대주의를 내면화시켰으며 이를 반추할 기회도 없었다”고 말했다.

아시안을 이용한 주류사회

미국 역사에서 초기 아시안은 백인 주류층에게 경제적 이용의 대상이었다. 19세기 중반 골드러시(Gold Rush) 때 가주에서 중국계 노동자는 저임금으로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때 노동자의 다수를 이뤘던 아일랜드계 이민자는 그들이 힘들게 쟁취해서 얻은 임금 기준과 노동환경이 중국계 때문에 무너지게 됐다고 생각했고, 이는 중국계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어졌다.

박 교수는 “이때 득을 본 게 주류사회다. 두 인종의 갈등과 당시 계급 구조를 교묘하게 활용해 이득을 취했다”고 말했다. 이어 “스탠퍼드 대학교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가 1861년 가주 주지사 출마 당시 내건 구호의 하나가 중국인 배척 운동이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후 1882년 중국계 노동자의 이주를 금지한 ‘중국인 배척법’이 등장했고 이 법은 무려 60여년 동안 지속됐다.

중국계에서 아시안으로

아시안에 대한 적대감이 커진 것은 20세기 중반이다.

박 교수는 “2차 대전의 적국이 일본이었던 영향이 크다”며 “거기다 1980년대 일본 자동차 산업의 성장은 아시안에 대한 반감에 불씨가 됐다”고 지적했다. “1982년 디트로이트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중국계 노동자를 일본계로 오인하고 살해한 두 백인 청년은 개인의 적개심이 아니었다. 미국에 침투하는 일본 산업에 대한 분노였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지금의 상황도 같은 맥락이라고 진단했다. “정치인과 언론은 마치 중국이 미국의 지식재산권을 훔쳐가고 산업스파이를 보내면서 미국이 가졌던 세계적인 패권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주류사회에서 보여주는 대로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이 되고 있다.”

황화론의 연장선

80년대 일본 지금은 중국이 부상하면서 아시안에 대한 적대감은 가라앉을 틈이 없었다.

박 교수는 “현재 상황을 '황화론(Yellow Peril·황인종이 서양 문명을 압도한다는 백인의 공포심)'의 연장선으로도 볼 수 있다. 최근 학자들 사이에서는 과학·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에서 서양인이 아시안을 이질적 혹은 위협적으로 바라보는 '테크놀러지컬 오리엔탈리즘(Technological Orientalism)'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아시안은 여전히 이방인이며 심지어 적이라는 생각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너는 여길 낄 수 없다(You don’t belong here)”,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Go back to your country)”라는 말에서 아시안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고 박 교수는 전했다.

그는 “아시안을 소수계가 아닌 미국에 살고 있는 타국민으로 보는 것”이라며 “Nativist Racism(이민 배척주의자적 인종차별주의)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타인종 이해 높여야

박 교수는 아시안 증오범죄의 해결책으로 “타인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안전을 위해 경찰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데, 이런 경계의 태도는 오히려 악영향을 초래한다”며 “아시안 증오범죄가 주류사회가 만든 인종에 대한 사회 구조적 모순에서 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강조했다

그러면서 “서로 이해하고 유대 관계를 맺는 것이 급선무”라며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M) 시위에 한인들이 가담한 것을 봤는데 좋은 자세다”라고 말했다. 또한 “아시안 증오범죄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게 신고하는 자세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박계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학사·석사

-뉴욕 시립대학교 인류학 박사

-프린스턴 대학교 인류학과 방문교수

-현재 UCLA 인류학과 및 아시안 아메리칸학과 교수

-저서:‘LA 항쟁: 4·29폭동 이후 한인과 흑인·라티노 관계’(LA Rising: Korean Relations with Blacks and Latinos after Civil Unrest)

일본계 급부상한 80년대
아시안 증오범죄 등장


학자들은 ‘아시안 증오범죄’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1980년대라고 추정한다.

증오범죄는 경제적 성장과 맞물린다. 당시 일본계의 경제 수준은 크게 높았다.

<그래프 참조>

2008년 연방 사회보장국(SSA)이 발표한 ‘이민자 소득 연구보고서'를 보면 1989년 21개 출신 국가 중 일본계의 중간 소득은 4만 달러로 가장 높았다. 이는 영국(3만2000달러)이나 캐나다(2만6268달러), 독일(2만5542달러)보다 높았으며 한인의 중간소득이었던 1만3000달러와 큰 차이를 보였다.

당시 연비가 좋은 일본 자동차의 침투로 미국 자동차 산업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미국은 위기감을 느꼈다. LA에서는 ‘일본으로 돌아가라(Go Back to Japan)’는 낙서가 등장했다.

실제로 1992년 연방 인권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아시안 증오범죄는 198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장수아 기자 jang.suah@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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