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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는 처음이라서] 한국에서의 일 년

남편과 나는 다소 이른 은퇴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한창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하는 가운데 몇 년 뒤에는 은퇴하겠다는 용단을 내리고 그 계획을 흔들림 없이 진행해가고 있는 배후에는 전에도 ‘젊어서 은퇴하기’라는 꿈을 그려보고 거기에 근접해 본 경험이 깔렸다.

젊어서 은퇴하기와 은퇴하면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 살겠다는 것은 남편의 젊었을 때부터의 꿈이었다. 그래서 미국 이민생활을 하자마자 그것을 목표로 한 십년이 넘는 장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갔던 경험이 있다. 어떤 꿈이든지 철저한 계획에 따라 장기간에 걸쳐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최선을 향해 나아간다면 중간에 시련과 문제는 만날 수 있어도 종래는 그 목적지에 근접하게 되는 것 같다.

한국에 나가 살 수 있는 재정적인 근거를 만드는 일에 성공하게 되자 남편과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애초의 계획을 추후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하여 역이민을 감행한 우리 가족은 남편의 고향인 대구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아이들은 우리가 살게 된 아파트 단지에서 가장 가까운 일반 초등학교에 편입시켰다. 한국에 정착한 지 몇 달이 지나면서 나는 집 근처에서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해 일하게 되었고 남편은 친구의 사무실에 다니면서 친구가 하는 일을 돕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한국에 나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아이들이 한국의 학교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고, 미국에 사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던 남편은 고국의 품 안, 고향의 친지들 속에서 맘껏 휴식을 취하는 일이었다.

나는 문화적으로는 미국보다 앞서가는 한국 생활의 편리함을 누려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살게 된 아파트 구조부터가 한국 주부의 생활방식에 맞게 설계되어 있어 비로소 내게 잘 맞는 옷을 입은 듯한 편안함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이역 이민 생활은 일 년 밖에 지속하지 못했다. 고국에서 잘 쉬는 사이에 고국에 대한 그리움도 어느 정도 희석되었고 그러면서 그 휴식을 충전기로 삼아 미국 생활에 다시 도전해 볼 결심이 서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때 우리가 은퇴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고 활발한 경제 활동을 하기에는 최적의 나이이기도 했었다. 일 년 동안 낯선 한국의 학교생활에 잘 적응해 좋은 성적을 냈던 아이들을 위해서도 나머지 학업과정은 그들이 태어났고 자랐던 미국으로 물꼬를 터주는 것이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남편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때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그때 한국에서의 일 년을 꼽곤 한다. 자기의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고 해도 그때 가족들을 다 데리고 한국으로 나갔던 일을 꼽곤 한다. 그때 가족들과 함께 여행 다니던 일, 큰 집에서 명절과 경조사를 함께 하던 일, 아이들이 한국말을 완전히 기회를 갖게 된 일들을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더라면 세월을 돌이켜서 다시 하지 못했을 일이라고 말하곤 한다.

세월이 흘러 지금 다시 은퇴를 계획하면서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은 그때와 같은 두 가지이다. 철저한 준비와 그 시기를 놓치지 않는 일이다.


위선재 / 웨스트체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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