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분자] 아름다운 빚, ‘소망’으로 갚는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4화> '간호사의 대모' 유분자
<7>에필로그 ‘마지막 꿈’
먼저 떠난 남편 잘할걸 후회
팔순 생일, 장례식 리허설로
결실 거둔 '소망소사이어티'
1800여명 시신 기증 공감대
시니어책자·소망동산이 꿈
암이라고 했다.
재작년 11월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유방암 검사를 받았다. 의사의 진단은 갑작스럽다. 대부분 환자들이 그렇듯 나도 믿기 어려웠다. 여든이 넘었지만 아직 건강했고, 자각 증상도 전혀 없었다.
2007년 소망소사이어티를 창립해 10년이 넘도록 ‘품위있는 죽음(well-dying)’을 외쳐온 내게도 ‘암’은 여전히 두렵고 무서운 단어였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돼 지난해 1월 수술을 받았고 20차례 방사선 치료과정을 거쳤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 외부활동을 못하니 쉬면서 오히려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
치료를 받으면서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뒷면이라는 말을 체감했다. 삶 쪽으로 놓인 동전은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 어떻게 뒤집힐지는 더더욱 모른다. 뒤집히면 죽음인데 대부분 뒤집힐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 하고 싶지 않아서다.
암 진단에 두렵긴 했지만 절망하진 않았다.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을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들을 초청해 세상과의 작별파티까지 이미 치렀다. 다만, 아직 못다한 마무리에 마음이 급해졌다.
#작별 리허설, 팔순 잔치
평소 아이들에게 내 장례식은 치르지 말라고 부탁해 왔다. 비우고 떠나고 싶어서다. 대신 내가 아직 살아있을 때 생전 장례식을 치르고 싶었다.
2015년 10월20일 팔순 잔치를 세상을 떠나는 작별 파티의 예행연습으로 열었던 이유였다. 장례식 리허설이라고 생각하니 하객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귀하고 반가울 수 없었다. 각계 인사들의 축사 후 동영상을 통해 지난 80년 내 삶이 소개됐다. 1968년 서른셋에 간호사로 미국에 취입 이민온 후 사회활동이 주로 담겼다. 쉴 틈 없이 달려온 반백 년 이민사였다.
간호사 한 사람이라도 더 RN 시험에 합격시키려 발 벗고 뛰었던 70년대, 고 이태영 박사를 만나 LA에 가정상담소를 발족시켰던 80년대, IMF 사태로 어려운 한국의 아이들을 돕자고 나라사랑어머니회를 결성했던 90년대, 소망소사이어티를 발족하고 아프리카까지 날아가 우물을 팠던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감사인사를 하러 연단에 서서 하객들을 살펴보니 감격의 눈물이 쏟아졌다. ‘이 생애를 이분들과 함께했구나, 굽이굽이 삶의 여정에 이분들이 동행해 주셨구나’ 감회가 새로웠다.
긴 인사를 준비했지만 입으로 나온 말은 짧았다. “정말 고맙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남편을 먼저 보내며
장례식 리허설을 열겠다는 결심엔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을 때 좀 더 잘할 걸’이라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2011년 11월9일 남편과 사별하면서 마음이 아파 무척이나 힘들었다. 남편은 인자하고 멋진 사람이었다. 함께 이민생활 여러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자식들 결혼시켜 이제 좀 여유롭게 살만하다 싶었는데 2000년 당뇨병 진단을 받았다.
상태는 점점 악화했고 발병 4년 후부터는 신장까지 나빠져 매주 3번씩 투석을 해야했다. 의사는 6년을 넘기 어렵다고 했는데 11년을 더 살다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 병상에 가족들이 모였다. 아들에겐 “엄마 힘드니 운전시키지 마라”고 당부했고, 딸, 사위, 손자, 손녀들 손을 일일이 잡고 눈을 마주치며 유언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게 말했다. “정말 미안해, 사랑해, 용서해줘”
그 세 마디에 50년 결혼 생활에서 쌓였던 서운함이 순식간에 녹았다. 후회가 밀려왔다. ‘왜 좀 더 잘하지 못했을까’하는. 죽음 준비에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과의 관계 정리가 포함된다. 아니, 어쩌면 그게 가장 큰 부분이다.
#단단해진 소망, 고마운 이들
소망소사이어티는 내일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후회할 일 없도록 돕는 단체다. 2007년 설립 당시 난 홀로 적진에 뛰어드는 장수 같은 기분이었다. 죽음 준비 단체를 설립하겠다고 말하면 대부분 난색을 표했다.
“나이를 생각하시고 이제 그만 좀 쉬세요.” “좋은 일 다 두고 왜 하필 죽음입니까?” “한인사회에선 그런 캠페인 안 먹힙니다.”
죽음 준비에 고개를 흔들던 한인사회에서 지난 14년간 소망소사이어티가 거둔 결실은 기적이다. 1200달러 이상 기부한 평생회원이 262명, 시신 기증 서약자가 1843명, 소망유언서 작성자는 1만4000여 명에 달한다.
소망소사이어티 동역자들과 이사진, 회원들의 헌신 덕분이다. 최경철 사무총장, 김미혜 사무국장, 김창곤 홍보실장, 남궁수진 사역팀장, 임제인 행정팀장, 박근선 차드 지부장, 박순빈 샌디에이고 지부장, 장희숙 새크라멘토 지부장의 능력과 열정은 눈물겹다. 정영길·김용화·이경미·최희선·황치훈·고새라·박유진 이사, 김정빈·서동성·정진홍·김옥라·그레이스 김·이정근·박용필·김종철·장두천 고문, 유태윤·김병희·조앤 이 홍보대사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소망은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그동안 함께 일해온 매일이 생일이었고, 매일이 크리스마스인 것처럼 설레고 행복했다.
#소망동산을 꿈꾸며
내겐 남은 소망이있다. 마땅한 후임자를 구하고 재정을 더 단단히 다져야한다.
2가지 큰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첫 번째는 한창 작업중인 ‘시니어 생활·건강 가이드’ 책자다. 만 65세가 돼 메디케어를 받는 시점부터 장례까지의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노년 생활 총정리 백과사전이다. 총 500쪽, 올 컬러로 제작될 가이드엔 노인성 질환, 간병인, 응급실 및 앰뷸런스 이용, 양로시설, 치매, 묘지 구입, 화장, 시신 본국 이송 등 다양한 건강 관련 정보가 수록된다. 또 노인 아파트 입주, 상속, 세금보고, 관련 기관 및 단체, 의료진 명단도 싣는다. 9월에 1차로 1만5000부를 출간해 무료로 배포할 예정이다. 예산 지원이 절실하다.
마지막 꿈은 ‘소망 동산’ 설립이다. 영어로는 ‘Peace Village’로 지었다. LA에서 멀지 않은 시골에 아담한 부지를 마련해 뜻이 비슷한 사람들이 함께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은퇴촌을 조성하고 싶다. 텃밭에서 농사짓고, 함께 밥을 지어먹고 산책하고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살아가는 그림을 그려본다. 기금이 많이 드는 일이니 내 생전에 이뤄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내가 못한다면 누군가 꿈을 이어받아 대신 실현해주길 바란다.
선한 일에 기부해준 모든 분들에게 난 갚을 수 없는 아름다운 빚을 졌다. 그 빚을 소망을 통해 갚으려 한다. 아직 쉴 수 없다. 부지런히 달리고 또 달린다.
▶도움 주실 분들:(562)977-4580 소망소사이어티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