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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일부러의 세상

어릴 때 농담으로 “미안해 고의였어, 실수가 아니었어”라고 말하면 깜빡 속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사과한 것으로 착각하는 겁니다. 보통은 “미안해 실수였어. 고의가 아니었어”라고 해야 하는 표현인데 순서를 바꿔놓은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실수를 인정하면 용서해 주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오히려 질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용서는 인간관계의 기본이었던 겁니다. 물론 지나친 사건까지 용서하기는 힘들었겠지요.

우리 법 제도는 범죄의 성립에 있어 ‘의도성’을 중요하게 봅니다. 의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고의적이냐, 아니냐가 범죄의 결과로 사람이 죽었다 등의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고의가 아니라면 죄가 아니게 되거나 벌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의성을 판단하는 기준 역시 쉬운 게 아닙니다. 때로는 나 자신조차도 나의 의도를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의도성을 갖고 남을 괴롭히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의(故意)라는 말을 순우리말로는 ‘일부러’라고 표현합니다. 일부러는 ‘부러’라고도 합니다. 부러라는 어휘는 용비어천가에도 나오는 말로 역사가 아주 깁니다. 어쩌면 일부러 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진 어휘일 수 있습니다. 일부러라는 말은 ‘일을 부러 한다’는 말이 합쳐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전에서 일부러의 의미를 찾으면 ‘실없이 거짓으로’라고 나옵니다. 일부러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의라는 말에도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지요. 일부러 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러, 일부러’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합니다. 일부러라는 말에는 일이 없어도 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좋은 일을 하는 현장에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는 말입니다.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에는 전혀 부정적인 느낌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고에 대한 감사와 폐를 끼친 듯하여 미안한 마음을 느끼게 하는 표현입니다. 일부러를 좋은 상황에서 많이 쓰면 세상이 달라질 겁니다. 일부러나 부러는 긍정이나 부정의 구별이 없는 말입니다. 오히려 일이 없어도 한다는 느낌이나 특별한 생각 없이 한다는 느낌을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일부러 하지 않아도 좋을 훌륭한 일도 많이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느냐고 하지만 일부러 찾아가서 도와주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아도 상대에게 도움이 되면 기쁘게 돕기도 하는 게 인간입니다. 인간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인간의 가장 이기적인 모습은 남을 도우면서 자신도 기쁨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기쁨은 나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것이 나에게도 가장 큰 기쁨이 됩니다. 아름다운 이기주의 아닌가요? 그런 의미에서 일부러는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인간은 일부러 남을 괴롭히기도 하고, 돕기도 합니다. 인간은 부주의하여 실수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괴로운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못도 하고 고치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후회도 하고, 기뻐도 하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다만, 내가 일부러 하는 일이 그에게도 기쁨이 되기 바라고, 내가 저지른 실수가 남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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