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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애국 목회자 이대위 목사(1878~1928)와 그의 교포 사역

한국의 초기 미국 이민 지도자들은 각자의 정치적 관심에 따라 다양하게 꼽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을 뽑는데 여기에 종교적 지도자 즉 기독교 지도자 한 명을 지적한다면 이대위 목사를 말할 수 있다.

1878년 평양 강서 태생인 이 목사는 모태 신앙인으로서 한문을 공부했고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했다. 1903년 졸업을 하자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는 오레건 주에 있는 포트랜드 학원을 1908년에 마치고 곧이어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했다. 목사가 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그 곳에 한인연합감리교회를 세웠다.

그가 3대 담임목사가 되자 애국지사 안창호와 같이 일본의 한국침략을 대항하여 샌프란시스코(상항)에 공립협회를 설립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나자 한국에서 유명한 양두산목사를 초청하여 한인구호 사업과 교육계몽에 전력을 다했다. 1910년 한일합병이 발표되자 한인은 국적을 잃게 되었다.

이 목사는 한인교계와 여러 단체의 지도자들을 모아 “국민회”를 조직해 북미지방 총회 부회장이 되고 “신한신보”라는 신문사를 세웠다. 그리고 신문 인쇄를 위해 활자혁명뿐 아니라 새 인쇄기를 발명했다.

이 목사는 한인들의 법적 지위를 명백히 하기 위해 미 국무장관 브라이언에게 서한을 보내 주미한인들은 일본 국적이 아니고 국민회가 한인회 대표기관임을 통지하고 임시정부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정을 요구하여 받아냈다. 1913년에서 1918년까지 5년간 총회장직을 지내며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등과 두터운 친분과 교제를 지켜왔다. 그는 안창호와 더욱 친했고 1913년 5월13일 흥사단 창립 예배를 인도했다. 장로교인이었던 안창호와는 같이 한인들을 믿음 속에서 이끌어나가며 반일 구국운동에 심혈을 가했다.

그의 “국민회” 일은 한인들의 여행증을 발부하고 한국인임을 증명했다. 무여권으로 입국한 불법노동자와 학생들을 보증하여 미국에 입국시켰고 사진결혼 여성들의 입국수속을 도와주었다.

또한 유학생 지참료(보증금)과 재정보증서를 발부했고, 질병을 겪는 한국인들의 병원입원비를 지불했다. 그는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잡지 “대도”와 “신한보”를 발간했다. 또 국내 소식과 민족 애국심을 장려하였고 세계정세를 보도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교인을 심방했고 새로 오는 한인들을 영접하고 정착 할 때까지 모든 일을 솔선수범했다. 그는 “인터타입 한글식 타자기”의 발명가로 이름이 났고 글을 잘 쓰고 영어도 곧잘 잘했다.

1910년 후 그의 활동은 더욱 바빠져 각 지역 애국 단체 지회를 세우고 필요한 재원을 모집했다. 교회 부흥과 교인봉사에 힘쓰면서 31세에 그는 담임목사 되었다. 애국운동에도 더욱 힘쓰게 되면서 미 정부 지도자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주일과 저녁에는 한글학교를 세워 글을 모르는 성인들에게 한글과 국내의 사정을 알리고 교육시켰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처음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을 졸업했다. 미 감리교회의 앨더 목사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고국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그는 바로 미국에서도 500여명의 유학생과 사진신부 700여명을 독립선언식에 참여시켰다. 이대위 목사는 뛰어난 지도력을 가졌고 이것을 사랑으로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긴 실직적인 재미 한인의 지도자였다.

그는 영적으로 또 육신 및 정신적 지도자로서 알려졌지만 이 목사는 또 사랑의 교육자요 삶의 봉사자였다. 그의 몸은 항상 지쳐 있고 언제나 고달픈 속에 건강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한 실력주의자요 좋은 성격의 소유자로서 외교에도 능숙했다. 역사가들은 그를 7명의 유명한 한인 지도자 그룹에 포함시켰다. 여기에는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박영효, 윤병구, 김호 등이다. “7인 지도자” 활동이 많았다.

1923년 6월17일 그가 54세에 과로로 인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국정부는 그의 애국심에 감사하여 건국훈장 독립상을 1965년에 수여하고 1966년에는 고국의 국립묘지에 이장했다.

금년은 이대위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93주년이 됐다. 그에게서 사랑과 도움과 교육을 받았던 성도들의 후손들은 그를 추모해야 한다. 재미한인들은 그를 추모해 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민사회 역사적 사명이다.

이대위 목사는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사랑과 봉사로 일생을 바치신 분이며 우리의 귀한 지도자 중의 한 분이었다.

정치나 사회지도자는 경험, 인격과 지도력이 있어야 한다. 안창호(정치) 박용만(군사) 이승만(정치, 학문) 윤병구(영어) 김호(백만장자) 이대위 목사(목회와 커뮤니티 서비스)는 주로 오클랜드 캘리포니아 지역에 살면서 새로 오는 한국이민자를 환영했다. 그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때까지 도왔고 학생들은 직장을 구해주었고 미국의 국무장관에게 우리 교포를 도와주기를 요청했다. 외교를 위해서 워싱턴에 외교위원회를 세울 것을 임시정부에 건의해서 이승만대통령이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 목사의 커뮤니티 사랑을 짐작케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 동포들 잘 주무셨습니까?” 하는 말을 습관적으로 계속 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여러 가지 인종 차별이 벌어지고 있는 이즈음 한인 기독교인들이 이대위 목사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카고 한미역사학회 회장)


함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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