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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울타리 없는 집

계절이 주는 풍요로움과
뜰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있어 자유를 숨쉰다
고칠 곳 많은 오래된 집을
처분 못하고 사는 이유다

우리 집은 울타리가 없다. 비가 갠 후, 탁 트인 옆집의 잔디가 한층 푸르게 보인다. 가끔 멀리서 말 울음소리가 ‘히이잉’ 들려온다. 빈 마당엔 옛 마구간의 여물통이 놓여 있다. 넓은 공간은 산토끼, 다람쥐의 놀이터가 된다. 텅 빈 곳 사이에 흐드러지게 핀 진분홍 부겐빌레아꽃 넝쿨이 울타리를 대신한다.

언제부터인가 이웃에 멋진 새집을 건축했다. 높은 겹 콘크리트 담에 철망이 얹어지고, 철문을 자동으로 여닫는다. 견고한 성을 연상시킨다. 뒤늦게나마 너무나 허술한 우리 집 경비체제에 경각심을 갖는다. 현관문을 정비하고 담을 쌓아야 하나? 알람을 설치해야 할까? 많은 생각이 오간다.

몇 년 전 대낮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우리 집에 좀도둑이 들어와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갔다. 서랍과 선반의 물건들이 다 끄집어 내던져 있고, 현금을 찾았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있을 리 없는 현금 대신 화장대 서랍에 있던 액세서리들을 모조리 쓸어 갔다. 값이 나가지 않는 물건이지만 손때가 묻어 정이 들었기에 오랫동안 서운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후론 물건에 대한 애착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무소유에서 오는 자유라고 할까? 언제 누가 들어와도 가지고 갈 것이 없다는 배짱 아닌 당당함으로 산다. 애써 소유하려 하지 않아도 시기에 따라 필요한 것은 공급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현관을 나가면 열린 마당과 트인 정원이 좋다. 추운 겨울이 지날 무렵, 단아한 수선화와 매실이 꽃잎을 열어 오는 봄을 알려준다. 오렌지꽃이 밤공기를 흔들어 향내를 온 집안 가득 채워준다. 단풍 든 나뭇잎이 떨어져 가을의 정취를 더해주고, 쌓인 낙엽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계절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과 뜰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있어 자유를 숨 쉰다. 이 때문에 크지만 수리할 곳이 많은 오래된 집을 처분하지 못하고 살고 있나 보다. 울타리 없이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20여 년 전 이사를 왔을 때, 윗집에 외국 할아버지가 홀로 조카와 살고 계셨다.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은퇴하신 분이셨다. 가끔 친구 할아버지가 놀러 오곤 하셨다.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집을 비울 땐 서로 알리고 유심히 지켜봐 주었다. 추수감사절, 성탄절에는 과자를 구워오거나 음식을 나누었다. 든든하고 좋은 이웃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고 차도 다니지 않았다. ‘아프신가?’ 궁금이 걱정으로 변해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몇 달 후, 집 앞에 ‘Sale’이란 간판이 붙어 깜짝 놀랐다. 이미 할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럴 수가!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20년을 지나며 나이가 드시고 수척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부를 묻지 못하다니!’ 바쁘다는 핑계로 대화 없이 지낸 무관심이 미안했다. 굳게 닫힌 철문을 바라보는 마음이 무거웠다.

몇 달이 지나 새 이웃이 이사를 왔다. 이삿짐 차에 한글이 적혀 있어 반가웠다. 어느 가족일까? 무척 궁금했다. 어두울 때 출근하고 퇴근하니 만나기가 어려웠다. 내가 문을 먼저 두드려야지. 용기를 내어 메모를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 “반갑습니다. 아랫집에 사는 유씨 가족입니다.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좋은 이웃으로 지내길 원합니다.”

‘안전을 위한 울타리’라는 명분으로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가린 채 대화 없이 단절되어 살아간다. 이웃과 트인 소통이 열린 마당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진실한 사귐이 교통 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유색인종 차별과 혐오의 범죄가 잇따른다. 다르다는 이유로 얻어지는 상실감을 체험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이 가까이 다가오는 시기에 가져야 할 가치이다.


이희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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