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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개나리꽃 이야기

잃어버릴 뻔한 색깔들을 기억해내고 되찾게 해준 봄. 기억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풀게 해준 봄. 사람의 마음을 훔쳐 가버린 봄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봄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무엇보다 개나리지요. 어린 시절 유년의 기억 속에도 선명히 남아있는 노란 개나리, 입매를 삐죽 내밀고 예쁜 짓 하는 노란 개나리 말입니다. 겨우내 눈이 쌓인 뒤란에 이른봄 눈이 녹고 나면 제일 먼저 푸른 빛 치렁한 가지 끝에 매달린 정겨운 이 꽃을 거의 잊을 뻔 했습니다. 이곳 시카고에 정착 하고 난 후에도 한동안 잊어버리고 살았던 그 개나리꽃이 어느 날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개나리의 풍취는 휘어져 내리거나 길게 뻗어있는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꽃들의 자연스러움인데, 이곳에선 동그랗게 만들어주거나 네모로 반듯하게 잘라주니 그 느낌이 개나리와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한적한 길을 걷다 휘영청 가지들이 뻗어난 자리마다 노랗게 피어난 노란 개나리 꽃을 마주친 순간 나의 기억은 빠르게 초등학교 유년의 때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뒤란에는 아직 피지 않은 분꽃, 키 작은 채송화, 누이와 여동생의 손톱에 빨간물을 들이던 봉숭아도 그 키를 키우고 있었다. 넝쿨을 따라 오르는 나팔꽃도, 키 크고 얼굴도 큰 해바라기도 그 키를 키우는 따스한 봄날이었다. 뒤란의 왼쪽 끝에 장독대가 있었고 바로 그 옆으로 휘영청 뻗은 가지마다 노란 개나리꽃이 만발하였다. 이른봄 제일 먼저 피는 개나리, 그 개나리꽃을 볼 때마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 종아리를 맞던 기억이 난다. "뒷뜰에 가 개나리가지를 꺾어오너라." 그때 나는 회초리를 고르려고 이 가지 저 가지를 휘적이며 다녔다. 축 휘어진 개나리 가지마다 노란 꽃들이 줄지어 피어있었다. "나를 꺾지마세요." 뾰족한 입을 모으며 애원하는 소리에 빠져 방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어머니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개나리 꽃무덤에서 길을 잃어버린 그날의 기억은 잃어버릴 뻔한 노란 색감과 다른 세계의 문을 들여다보게 해준 우주 속에 펼쳐진 다른 소우주의 기분 좋은 상상이었다.

개나리는 집을 이사오면서 아버지가 심으셨단 말을 어머니를 통해 들었다. 그땐 이미 아버지는 이 땅의 사람이 아니었기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역할까지 감당하셔야 했다. 내겐 누나 셋이 있었고 세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엄하셨지만 지금도 어머니의 품이 그리울 만큼 날 많이 안아주셨다.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소리는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며 어린 시절 사랑과 매로 나를 키우셨다. 내가 꺾어온 개나리 가지로 종아리를 치시면서 나도 울고 어머니도 우셨다. 그때 나는 아파서 울었지만 어머니는 왜 우셨을까? 이유를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건 아버지의 매라고 하셨다. 벌건 종아리를 쓸어주시면서 날 안아주셨다. 그때도 따뜻한 봄날이었고 소리 없이 찾아드는 행복이 있었다. (시인, 화가)

길을 잃어버렸다 / 목적지를 잃어버렸다 /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길 / 나무가 무성한 산길을 따라 / 걸음을 옮기는 기억 뿐 / 노란 개나리 꽃무덤 / 그 안에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 / 길을 잃어버리고 / 생각도 잃어버렸다 / 나는 노란 개나리꽃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 길을 잃어버렸다 / 생각을 잃어버리고 / 나를 잃어버린 그 날 / 시간이 정지된 듯 / 걸음이 의식되지 않는 / 유년의 뒤란 장독대 옆 / 숨을 토해내는 개나리 꽃무덤 / 어머니의 회초리를 맞으며 / 아프고 행복했고 포근했던 어머니 품 / 휘어지는 가지 끝에 번지는 / 나는 행복한 노란 개나리꽃이 되었다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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