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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앤 테크놀로지] 백남준의 디지털 미술과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아날로그 회화

백남준 | 아베 슈야,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 1969~1972, CRT TV 모니터 2대, 에나멜 코일 2개, 폐쇄회로 카메라 2대, 앰프 1대, 신호 발생기 5대, 컨트롤 보드, 168×64×114 cm, 경기문화재단 백남준 아트센터, 소장품 번호 018

백남준 | 아베 슈야,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 1969~1972, CRT TV 모니터 2대, 에나멜 코일 2개, 폐쇄회로 카메라 2대, 앰프 1대, 신호 발생기 5대, 컨트롤 보드, 168×64×114 cm, 경기문화재단 백남준 아트센터, 소장품 번호 018

동독 출신의 독일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1932년생이다. 2월에 태어난 리히터보다 7월생인 백남준이 조금 더 늦게 태어났다고 볼 수도 있다. 백남준 작가는 2006년 생각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고 리히터는 90세를 바라보고 있다. 2021년 초반에 세상을 떠난 김창열 작가가 1929년생이었는데 셋은 비슷한 세대라고 볼 수 있다. 리히터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에 동독 드레스덴에서 서독의 뒤셀도르프로 망명하였다. 1956년 동경대학교에서 음악미학을 공부하고 60년대 초반 서독의 뮌헨에서 학교에 다닌 백남준은 리히터와 동시대 서독의 실험예술작가 요셉 보이스 등과 어울렸다.

두 사람의 예술적 비전이 갈라지는 것은 60년대 중반이다. 백남준은 1964년 뉴욕으로 무대를 옮겼고 리히터는 계속 서독에서 회화 중심의 작품을 선보였다는 것이다. 백남준은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조지 마시유나스 등은 플럭서스(Fluxus)를 중심으로 개념미술을 선보였다. 동독에서 갓 도착한 리히터는 이런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이 낯설었고 동독에서 배운 고전적인 미술교육을 바탕으로 한 회화에 집중하였다.

60년대 초반 미국 미술은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뒤로하고 미니멀리즘과 팝아트가 새로 등장하고 있었다. 리히터는 도널드 저드, 리쳐드 세라, 앤디 워홀 등의 미국 작가들을 인식하고 본인의 색깔을 만들어가고자 하였다. 사진을 기반으로 한 추상회화는 리히터의 주된 표현 언어가 되었다. 같은 시기 백남준은 새로 나온 테크놀로지의 산물인 컬러 텔레비전 세트의 화면을 조절하는 기술을 만들어내었다.

1963년 백남준은 히데오우치다(1935~2012)라는 방사선 과학자와 슈야 아베라는 방송기술 전문가를 만나 협업을 하였다. 백남준과 아베는 신서사이저(Paik/Abe Synthesizer)를 발명하였다. 이 기계장치는 폐쇄 회로 비디오 방송과 녹화된 화면 등을 작가가 원하는 대로 길이나 화면 효과 등을 조절하도록 도와주는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그리하여 1965년 뉴욕의 뉴스쿨(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은 백남준을 초청하여 ‘백남준: 사이버네틱스(Nam June Paik: Cybernetics)’라는 전시를 열어주었다. 1974년 시라큐스에머스 뮤지엄 오브 아트 초청으로 열린 전시 카탈로그에서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장치는 사람들이 텔레비전 화면을 캔버스처럼 사용하도록 다음과 같이 도와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정확하게; 피카소처럼 자유롭게; 르누아르처럼 다채로운 색감으로;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잭슨) 폴록처럼 폭력적이면서도; 재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으로” (Nam June Paik, Video ‘n Videology 1959~1973, Emerson Museum of Art, Syracuse, New York, 1974 p.55).

7개의 텔레비전 기기를 동시에 조절할 수 있는 장치는 사람 키보다 큰 책장을 가득 채우는 복잡한 기계 시설이었다. 1932년생 아베는 동경대학교를 같이 다닌 사이로서 물리학과 공학 전문으로 졸업 후 동경방송 기술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베는 백남준을 다시 만난 이후 비디오 아트의 새 영역을 기술적으로 도와주게 되었고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1963~1965년대 리히터 또한 플럭서스 페스티벌에 참가하기도 하였고 환등기를 이용하여 사진을 벽에 투사하여 드로잉하거나 물감을 입히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하지만 갤러리 등지에서 리히터의 마케팅 문구는 “자본주의적 사실주의(Capitalist Realism)”였다. 가구점을 빌려 작품과 함께 작가 자신이 ‘조각’처럼 판매를 위한 전시품이 되었다. 지그마폴케와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유화 중심의 신사실주의를 표명하는 작가가 되었고 같은 시기 백남준은 사이버네틱스라는 전무후무한 새로운 방식의 미술을 천명하였다.

3월 26일 아시아 소사이어티 트리에니얼의 두 번째 설치작품 시리즈들이 선보였는데 복잡다단한 대형 설치작품 중에서 모니터에 의존하지 않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유튜브의 개통이 2005년이었는데 최근 유행하는 일인 유튜버 방송 및 비디오 형식의 소통 포맷은 백남준 작가의 선구적인 면모를 다시 일깨우게 한다. 1960년대 초반 회화 중심의 미술 표현 방식은 여전히 유효했지만 2020년대 현대미술 페스티벌 및 전시장에서 퍼포먼스 중심의 시간 예술적 동영상이 압도적 우위를 점유하였다는 데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팔리는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미래지향적 테크놀로지를 응용한 미술적 표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끊임없이 추구한 백남준 작가의 작가 정신과 창의성을 누가 이어받을지 기대된다. 미술대학의 각종 졸업 작품전이 몰려온다. 팬데믹 동안 스크린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익숙해진 미술 대중들이 눈여겨 살펴볼 것이다.


변경희 / 뉴욕주립대 교수·미술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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