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분자] 가족식당으로 출발 수백만불 기업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4화> '간호사의 대모' 유분자
<5> 간호사에서 사업가로
‘나성파’ 유씨, 5대 134명으로
가족 정착위해 73년 식당 개업
2년 뒤 프랜차이즈 비지비 설립
갈비샌드위치 원조 K푸드 성공
소스 개발하며 14개 지점 확장
97년 한국 에버랜드로 ‘역수출’
“아이고, 이게 얼마 만이유, 하나도 안 변하셨네유~”
1999년 12월25일. 역사적인 밀레니엄을 엿새 앞둔 성탄절에 디즈니랜드 인근의 더블트리호텔 로비는 우리말로 시끌벅적했다. 다들 느린 듯 말끝이 올라가는 충청도 특유의 사투리로 서로 반겼다.
이날 모임의 공식 명칭은 ‘문화 유씨 나성(LA)파 가족 모임’이다. 나성파는 유분자라는 작은 밀알 하나로 미국에서 뿌리내렸다. 1968년 12월12일 간호사로 취업이민 온 나는 1972년부터 1975년까지 4년 동안 형제 6명을 모두 미국에 초청했다. 그 직계 가족 3대 87명이 이날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시종일관 가슴 벅찬 감동이었던 모임은 1999년 12월27일자 미주중앙일보 1면에 소개되기도 했다.
22년이 지난 지금, 3남4녀 우리 형제 중 나와 남동생만 살아있고 언니오빠들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유씨 나성파 가지는 5대, 134명으로 더 무성해졌다.
가족들이 미국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해준 일등공신은 34년간 운영했던 ‘비지비(Busy Bee)’다. 유씨 나성파 생계의 원천이자 한식 세계화의 원조 식당이다.
#핫도그 굽고 감자 튀기고
인생은 ‘필연’이라는 씨줄과 ‘우연’이라는 날줄로 만들어진다. 내 인생에서 가장 굵은 필연은 간호사가 된 것이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삶 깊숙이 파고든 우연의 날줄은 요식업에 종사하게 된 것이다.
미국에 온 뒤부터 난 무조건 월급의 4분의 1을 저축했다. 차차 경제적으로 안정됐고 곧 목돈을 쥘 수 있었다. 자연스레 가족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목표가 됐다. 그리고 이민 5년만인 1973년, 셋째 소자 언니가 요식업이라는 우연의 길로 날 밀어넣었다. 가족이 힘을 모아 식당을 하자고 했다. 갓 이민와 영어가 서툴고 직장이 필요했던 가족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는 최고의 아이디어였다.
1973년 7월 애너하임의 ‘페드마트(FedMart)’라는 할인 매장내 스낵바를 인수해 첫 식당을 열었다. 운영은 내가 하고 주방은 셋째 언니가 책임졌다. 햄버거, 핫도그, 감자튀김을 팔던 스낵바는 우리 가족의 ‘식당 실습장’이었다.
가게가 잘되자 확장을 꿈꿨다. 둘째 화자 언니도 의기투합했다. 2년 뒤 부에나파크 샤핑몰내 ‘테이스트 모슬’이라는 음식점을 인수했다. 주방을 맡은 둘째 언니는 부여에서 30여 년간 한정식 식당을 운영한 경험이 있었다. 한식에 자신 있었던 언니는 국적 불명의 샌드위치를 개발해 팔았다. 샌드위치에 햄 대신 불고기나 갈빗살 구이를 넣어 불고기 샌드위치, 코리안 바비큐 샌드위치라는 이름을 붙였다. 듣도보도 못한 메뉴는 큰 히트를 쳤다. 당시로선 국적 불명 음식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K푸드의 원조였다.
가게가 안정되자 언니가 더 큰 그림을 제안했다.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키우자고 했다. 내가 첫 식당을 개업한 1973년 팬다 익스프레스가 처음 문을 열었고 두 번째 식당을 시작한 1975년 요시노야가 미국에 처음으로 진출 했다. 우리라고 못할 것 없었다.
한식을 주메뉴로 꾸미고 1975년 7월 간판을 바꿔달았다. 비지비 1호점의 탄생이었다.
#일벌 같은 식당, 비지비
40대 초반이었던 당시는 내 인생에 가장 바쁜 시기였다. 아침엔 간호협회장, 낮엔 식당 사장, 밤엔 간호사로 시간을 쪼개 살았다. 친구의 남편은 그런 내가 부지런한 일벌과 닮았다면서 식당 이름을 부지런한 일벌이라는 뜻의 ‘비지비’로 지어줬다. 암컷인 일벌은 몸집은 가장 작지만 모든 생존 활동을 도맡아 한다. 집짓고, 먹이를 찾고, 천적과 싸우며 새끼까지 키운다.
비지비 초기에는 정말 일벌처럼 온가족이 식당에 매달렸다. 주방에선 언니들과 손아래 올케 둘이 일했고, 웨이트레스와 캐시어는 조카들이 번갈아 맡았다. 모든 식구가 열심히 일한 덕분에 비지비는 나날이 발전했다. 1986년 2호점을 연 이후 2005년 8월 14호점까지 확장했다. 성공의 원동력은 둘째 언니(2020년 작고)다. 1974년 마흔 일곱에 미국에 온 화자 언니는 2007년 비지비를 매각할 때까지 여든의 나이에도 앞치마를 두르고 식당에서 일했다.
나는 언니와 완벽한 콤비를 이뤄 16가지 자체 소스까지 개발해 주문자생산방식(OEM)으로 판매했다. 첫 달 매출 800달러 식당으로 시작한 비지비는 10여년만에 연매출 수백만달러를 버는 기업으로 성공했다. 비지비는 기업이기 이전에 존재 자체로 한식과 한국의 홍보대사였다. 1호점 간판에 영어와 한글을 병기했는데 당시 쇼핑몰내 한글 간판은 우리가 유일했다. 식당 내부에는 한식을 소개하는 영문 포스터를 제작해 붙였다. 간판과 포스터는 14호점을 열 때까지 비지비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LA타임스는 1992년 9월28일자 ‘마켓 앤드 머니(Market & Money)’ 섹션 1·4면을 할애해 비지비의 성공 사연을 크게 보도했다.
#삼성과 손잡고 한국으로
사업이 탄탄대로를 걷던 1996년 가을이었다. 비지비로 전화가 왔다. ‘에버랜드’ 직원이라고 했다. 용인 자연농원이 그해 3월 개장 20주년을 맞아 에버랜드로 이름을 바꿨다고 설명해줬다. 사장님이 한번 찾아뵙고 긴히 논의할 게 있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장님은 에버랜드를 세계 5대 테마파크로 만든 삼성의 최장수 CEO 허태학(77)씨였다. 직원 한 명과 비지비를 찾아온 허 사장은 에버랜드에 비지비를 열고 싶다고 했다. 믿기 어려웠다. 이제 갓 10여 개 지점에 불과한 비지비에 삼성이 동업 제안을 해온 것이니 말이다.
이유는 ‘맛’이었다. 디즈니랜드, 씨월드 같은 테마파크에 출장온 직원들이 비지비에 들렀다가 맛에 반했고, 그날 허 사장 역시 일부러 맛을 보러 비지비를 찾았다고 했다. LA갈비, 불고기, 돼지갈비, 매운 닭볶음, 돼지고기 등을 맛 본 허 사장은 그 자리에서 “계약하자”고 했다.
2만 달러를 받고 매상의 4%, 우리 소스를 쓴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손을 잡았다. 이듬해 1997년 4월 비지비 에버랜드 지점이 문을 열었다. LA에서 한국으로 진출한 대표적인 식당인 북창동순두부가 한국 마포에 처음 문을 연 것이 1998년이었다. 비지니는 그보다 1년 앞서 한국으로 역수출된 LA 한식당인 셈이다. 에버랜드는 5년 계약 기간 동안 비지비 소스 맛을 배웠고 다른 상호명으로 바꿔 운영했다.
#은퇴, 또 다른 시작
돌아보면 정말 숨 가쁜 인생이었다. 미국 땅에서 첫 10년간 간호사로, 사업가로, 지역사회 봉사자로 뿌리를 내렸다. 그러면서 두 번째 10년간 꽃을 피웠다. 고맙게도 사람들은 내 삶에서 피워낸 꽃들을 좋아했다. 세 번째 10년에는 그들이 나의 꽃이 되었다. 네 번째 10년, 일흔을 넘기니 이제는 쉴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엄마, 이제 나이가 있으시니 쉬시라”고 종용했다.
2007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32년간 운영해온 비지비를 양도했다. 이듬해 금융위기가 찾아왔으니 딸의 말을 듣고 사업을 정리한 건 행운이었다.
그런데 일상은 더 힘들어졌다. 평생 처음 할 일이 없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시작됐다.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 생각을 구체화했다. 마음이 바빠졌다.
그리고 3년만인 2010년 2월, 상상도 못한 사람들과 상상도 못한 일을 하러 상상도 못한 곳으로 함께 향하고 있었다.
아프리카다.
정구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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