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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는 처음이라서] 내 인생의 줄과 칸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쓰던 공책에는 줄이 가로와 세로로 처져 있었다. 그렇게 생긴 큼직한 칸에 한 자씩 또박또박 한글을 써넣곤 하였다. 어머니, 아버지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추석이 가까워져 왔습니다. 감도 익었습니다. 배도 익었습니다. 이런 문장들을 여기에 적어 넣었다. 이때 이 큼직하고 일정한 칸들은 한글의 맞춤법과띄어쓰기를배우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전체 문장의 균형 감각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을 노트의 한 장이라고 치면 일 년은 그 장이 365개인 노트의 한 권에 해당하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누구나 그 노트의 장들을 하루에 한 장씩 넘기면서 살고 있지만 이렇게 똑같이 생긴 장들은 자칫 밋밋하게 지나가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일 년의 날들을 담은 노트의 커버에 그해에 해야 할 프로젝트의 이름을 붙여두면 가고 있는 날들에 방향성이 생길뿐더러 가고자 하는 목표 지점이 더욱 뚜렷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날들과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해 어떤 줄도 긋지 않고 백지로 남겨 두고 그때그때닥치는 대로 살겠다는 것이나, 앞으로 살아갈 집이나 은퇴자금을 마련하지도 않는다는 말은 일견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무소유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람은 이 지구 위에 살아가는 이상은 어떤 공간을 점유하거나 물질을 소유하면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미래를 위해 특히 은퇴 후를 위해 아무것도 계획하지도 않고 준비하지도 않는다면 인생의 후반기는 그야말로 공허해져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주 구체적으로 계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강 줄이라도 그어 놓는다면 장래를 계획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은퇴 이후는 인생의 여분이나 마무리가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볼 기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등뼈가 휘는 노동과 가혹한 시련을 가져 왔던 한낮의 직사광선이 기울면서 만추의 언덕을 황금빛으로 쏟아지는 오후가 오듯이 은퇴는 열심히 성실히 살아온 사람들이 당연히 가져야만 할 쉼이 있고, 풍요와 여유가 있는 삶의 중요한 단계이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을 잘 맞아들이고 잘 쓰기 위해서는 백지 위에 줄을 긋고 노트의 커버에 제목을 부치듯이 장래에 대한 설계를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은퇴를 계획하는 일이 너무 늦었거나 너무 빠르다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늦었다 하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살아 보고 싶은 장래의 삶을 설계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그것을 미리 살아보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칸과 줄을 서툴게나마, 불완전하게나마 한 칸 한 칸 메워가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 같다.

인생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인지도 모른다. 줄과 칸이 정연히 쳐진 노트 위에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더 많이 담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앞날에 대한 희망과 소망도 더 밝을 수 있는 것 같다. 진도가 뜻대로 나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실하게 살아온 나날은 빼곡하게 노트를 채울 것이다.


위선재 / 웨스트체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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