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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친구야 어디가?

감기에 걸렸다면 벌써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다.
아무리 카톡을 보내고
전화 메시지를 남겨도
허공에 흩어진
대답 없는 이름이었다.

때르르릉, 때르르릉.

요란한 셀룰러폰 소리에 불에 댄 듯 깜짝 놀랐다. 줌 회의 중이었다. 다행히 묵음으로 해 놨기 망정이지 화살 같은 눈총을 피할 길이 없었다. 내 전화에 뜬 넘버는 모르는 번호였다. 크랭크 콜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극히 짧은 순간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 내 전화에 저장 안 된 번호들은 빨리 받지 않으면 블록으로 처리돼 자동으로 끊긴다. 그런데 오늘 나는, 프리픽스가 로컬인 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내 집게손가락이 이미 전화를 받고 있었다.

“여보세요. 실례지만 임지나씨세요?”

“네, 누구세요?”



“혹시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친구 되시는 숙자씨가 늘 이쁜이라고 불러주던 플로렌스예요”

“아 네, 기억하고말고요. 그런데 웬일이세요?”

이쁜이, 내 기억에서 멀어진 사람이었다. 몇 년 만인가. 이쁜이(플로렌스)는 전에 숙자씨와 같이 두어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처음은 숙자씨 언니네 집, 미리 크리스마스파티에서 가라오케를 하며 같이 놀았고 두 번째는 그 다음해 2월인가 숙자씨와 그녀의 언니, 나, 이쁜이 그리고 빵집 아줌마 다섯 사람이 1박 2일 데스밸리를 갔을 때였다. 그때 올백으로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이쁜이의 젊고 건강한 모습이 섹시하게 어필했었다. 데스밸리를 간 그날, 이쁜이와 내가 번갈아 운전을 했고 우린 데스밸리에서 미네랄 온천을 한 뒤 네바다주 푸럼프 카지노에서 하룻밤을 묵고 돌아왔었다.

“숙자 언니가 코로나19으로 오늘 죽었어요.”

“넷???”

내가 하도 크게 소리를 질러 이쁜이가 놀라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갑자기 가슴을 걷어차인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멍청하게 있자 이쁜이가 침묵을 깼다.

“다음 주 토요일 12시에 숙자 언니 집에서 추모 예배를 본데요. 언니 분이 좀 알려달라고 해서 사방으로 수소문해 전화번호를 알아내 연락 드렸어요. 시간 되시면 그 때 봬요.”

“네.”

나는 그냥 전화기를 들고 있었고 이쁜이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비실비실 패밀리룸으로 걸어 나갔다. 숙자씨가 오늘 죽었다는 것인지 며칠 전에 죽었다는 것인지 혼미한 상황에서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숙자씨가 죽다니.’

그녀와의 마지막 전화 통화가 필름처럼 돌기 시작했다.

“숙자씨 어때, 의사가 뭐래?”

“나 혼자 병원을 못 찾아서 딸하고 같이 어바인에 가서 검사 받고 왔어요. 음성이래요.”

“그래, 그럼 감기네. 감기도 빨리 나아야 해. 몸이 약해지면 코로나가 침투한데. 알았지. 얼른 약 먹고 일어나요. 또 전화할게. 치료 잘하고 꼼짝 말고 있다가 코로나 끝나면 만나요.”

“응, 지나씨 고마워.”

2020년 2월 초부터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19, 미국에서도 3천만 명이 넘는 확진자에 52만 명이 넘게 죽었고 세계 도처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다. 내가 살고 있는 오렌지카운티도 25만 명의 확진자에 사망자도 4천명이 넘는다. 날마다 TV에서 코로나 뉴스를 쏟아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경제는 파탄나고 우리들의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오죽하면 ‘뭉치면 죽고 헤어지면 산다’는 말이 판을 치겠는가.

그 뒤로 여러 번 숙자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메시지를 남겨도 리턴콜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카톡을 보내봤지만 역시 흘러가는 바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소식을 끊어버린들, 이보다 더 초조하고 애가 탈까. 그녀의 감기가 나았다면 내게 벌써 수십 번 전화를 하고도 남았을 텐데. 사막의 풀잎처럼 목이 말랐지만 그녀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나 역시 건강한 상태가 아니었다. 2019년 8월 말 그랜드캐년에 문학 캠프를 갔다 오는 길에 사고로 왼쪽 발목이 부러졌다. 그 해 9월에 발목에 8개의 스크루를 박는 수술을 했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작년 5월쯤 발목의 스크루를 뽑았을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로 그 수술이 무한 늦어졌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작년 7월 말, 4년 전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또 오른 쪽 어깨 수술을 받았다.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숙자씨가 소식을 끊기 전까지는 2~3일마다 전화나 카톡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녀와 나의 카톡 방은 4사람이 팀이었지만 주거니 받거니 대화는 늘 나와 숙자씨였고 카톡에 제일 먼저 응답을 하는 사람도 숙자씨 아니면 나였다. 그녀가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온 지도 한 달이 넘었다. 감기라면 벌써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런데 아무리 카톡을 보내고 전화 메시지를 남겨도 숙자씨는 허공에 흩어진 대답 없는 이름이었다. 다른 두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들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숙자씨와 한 동네 가깝게 사는 혜영씨에게 한번 찾아가 보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혜영씨는 “연락 안 돼요”라고 했다. 왠지 숙자씨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같았고 나도 언제 저런 취급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몹시 착잡했다.

코로나 희생자들, 어찌 숙자씨 뿐이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죽어갔지만 나는 숙자씨의 죽음처럼 슬프지 않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곁을 떠나간 그 많은 사람들! 그들 또한 누군가의 자식이며 누군가의 어버이요 누군가의 아내요 남편이며 또 누군가의 형제고 자매며 친구다. 나는 지금 떠난 모든 이들의 가족들에게 친구에게 진심으로 내 마음의 슬픔을 전하고 용서를 빈다.


임지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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