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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아흔여덟 어머니와의 산책

어머니와 함께 동네 산책을 하러 가는 길이다. 먼 옛날에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아장아장 걷던 내가 그랬듯이 어머니도 막 걸음을 시작한 아이처럼 아흔여덟 살 아기가 되어 아들 손을 꼭 잡고 아장걸음으로 따라나선다.

첫 손녀가 첫걸음을 시작했다.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있는 바이러스 탓에 몇 번 보지 못하고 아이의 돌을 맞았다. 이제나저제나 한 번 안아보는 게 소원인 외할아버지의 마음을 아이는 알아주지 못했다. 이틀이 멀다 하고 화상 대면을 했어도 아이의 낯가림은 여전했다. 섭섭했지만 아직 때가 아닌 모양이다. 백신도 맞았으니 이제 자주 볼 것이고 어느 날 ‘할아버지’ 하고 두 팔 벌려 안겨 올 날이 있을 것이다.

아이가 제 엄마의 손을 잡고 후들거리는 발을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딸아이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어제 일만 같은 서른 해 전에 딸아이와 나도 그랬었지. 그 아이가 그새 애 엄마가 되었다. 딸아이가 제 아이를 어르는 모습을 보면 지난날의 어머니와 내가, 나와 딸이 또 그곳에 있었다.

늦은 나이에 나는 첫아이를 얻었다. 딸이었다. 아이가 첫 뒤집기를 했을 때나 처음으로 스스로 앉았을 때와 처음으로 기고 처음으로 섰을 때, 아이가 하는 것은 모두가 처음이 되어 그때마다 환호했었다.



뒤뜰에 모인 수상한 사람들이 가면 같은 마스크를 쓰고 제게 다가서는 모습을 보며 멀뚱거리던 아이가 저도 힘들었는지 제 엄마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제야 할아버지도 자는 아이를 안아본다. 쌀알처럼 흰 아랫니 두 개, 윗니 두 개를 달고 쌕쌕 날개 젖는 소리를 내며 천사가 잠들어 있다. 아이를 안는다는 것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환치할 수 없는 순수를 안는 기쁨이 있다. 세상의 어지러운 물에 찌든 눈도 그 순간만큼은 아이의 눈을 닮는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다 보면 바짝 마른 손이 한 손에 폭 감긴다. 한창 커 갈 때 한겨울 엄동에 귀가하는 아들의 꽁꽁 언 손을 당신의 맨가슴에 집어넣던 손이었다. 어머니의 손이 그때는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버럭버럭했던 순간들이 섬뜩해진다. 곧 후회하게 될 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때그때를 참아내지 못한 내가 아프다.

사리 밝고 음전하셨던 어머니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셨던지 깜빡깜빡 잘 잊어버린다. 천륜을 이간질하는 세월 앞에 어머니도 조금씩 세상의 소리를 잃어 가시는 것 같다.

엄마, 힘들어? 아직 괜찮다.

자카란다 나무 밑을 지날 때 어머니의 콧잔등에 깨알만 한 땀방울 몇 점이 송송 맺혔다. 나는 손등으로 땀을 닦아 주었다. 예전에 어머니가 내게 했던 것처럼.


조성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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