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6> 애틀랜타 필하모닉오케스트라 박 민 뮤직디렉터
정비소 운영하며 30년 음악 인생 즐겼다
1998년 교향악단 창단 ‘열정’
바흐부터 K팝까지 두루 연주
음악제·오페라 등 기획·연출
한인사회 묶고 자부심 높여
예술의 길은 늘 배고픈 작업
“젊은 예술인 좌절 없었으면”
애틀랜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Atlanta Philharmonic Orchestra) 박민(61) 단장. 건네받은 명함에는 오케스트라뿐 아니라 합창단, 오페라단에 음악학교까지 운영하는 CEO 겸 뮤직디렉터라고 적혀있었다. 얘기를 나누면서 자동차 정비소를 30년 가까이 운영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남다른 이력을 가진 박민 감독의 애틀랜타 음악 활동 30년을 들어봤다.
- 처음엔 이름만 보고 애틀랜타시가 운영하는 교향악단인줄 알았다.
“그런 이야기 많이 듣는다. 시에서 재정을 대는 곳은 필하모닉이 아니라 심포니다. 애틀랜타 심포니. 하지만 우리도 역사가 23년이다. 태동기까지 합치면 30년이 다 되어 간다. 연주자도 대부분이 미국인이다. 조지아에선 애틀랜타 심포니 못지않은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 서울대 음대 출신이다. 전공 악기가 뭐였나?
“트럼펫이다. 미국 오기 전 서울시향 등에서 객원으로 트럼펫을 불었다. 대한민국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도 활동했다. 지휘자 금난새 선생과 함께 대만 순회 연주 다녀온 기억이 생생하다.”
- 지금도 트럼펫을 부나?
“그렇다. FBA(First Baptist Church Atlanta)라고 미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교회 부설 오케스트라인데 이곳에서 17년째 트럼펫 연주자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주에도 함께 모여 연습했다”
- 그래도 주된 활동은 지휘나 기획, 연출 쪽인 것 같은데.
“한국 있을 때부터 오페라나 가극 연출에 관심을 가졌다. 서울시립오페라단, 서울오페라단 등에서 일을 했다. 부산시민회관에 올렸던 오페라 토스카 조연출을 갑자기 맡아 정신없이 뛰었던 일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지금도 그런 쪽 일이라면 신명이 난다.”
- 미국에는 언제 왔나?
“1987년이다. 뉴욕으로 왔는데 다들 그렇듯이 음악 공부를 더 하려 했다. 하지만 미국 생활을 하면서 생활과 접목된 실용음악 쪽에 눈을 뜨게 됐다. 아무리 멋진 연주도 관객이 외면하면 소용이 없지 않은가. 누구든 친근하게 듣고 즐기는 음악, 연주자 입장에선 연주 자체가 즐겁고 신나는 음악이어야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우리 애틀랜타필하모닉이 바흐부터 조용필이나 K팝에 이르기까지 장르 가리지 않고 다양한 연주를 시도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 애틀랜타필하모닉을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달라
“1998년에 정식 창단했다. 처음 출발은 1993년 애틀랜타 예술제 때였고 이후 1995년에 시작한 청소년 연주자 중심의 유스(Youth) 오케스트라가 실질적인 전신이었다. 현재는 각 파트별로 12명의 수석연주자들이 있다. 코로나 직전 전체 유급단원만 38명이었다. 다민족이 사는 미국에서 음악을 통해 인종 간, 민족 간의 벽을 허무는 것이 우리 오케스트라의 창단 목적이다.”
- 기억에 남는 공연을 꼽는다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음악회’이 인상적이었다. 둘루스 인피니티에너지아레나에서 ‘평화와 화합의 대합창’을 주제로 열렸는데 조지아 한인사회 화합뿐 아니라 한국 문화 수준을 주류 사회에 알리는데도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 공연으로 올린 창작마당극 ‘봄봄(Spring, Spring)’도 대단했다. 한국 문화와 정서를 담은 오페라가 풀(full) 프로덕션으로 애틀랜타 무대에 올려 진 것은 처음이었다.”
- 오케스트라를 운영한다는 게 힘들지는 않나?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솔직히 열정만으로는 밥 먹고 살기가 힘들다. 문화나 예술 활동은 기본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성원하는 든든한 후원자들이 있어야 하는데 미주에선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했다. 가족 생계도 해결하고 오케스트라 운영 등 음악 활동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아내에게도 덜 미안해 할 수 있었다.”
- 정비소라니?
“로얄오토월드라는 바디숍을 30년 가까이 했다. 2018년까지 하고 접었는데 나름 할 만 했다. 잘 못믿으시겠지만 의외로 자동차 정비가 악기 연주와 많이 닮았다.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한 것도 그렇고 자동차나 악기나 마찬가지로 손으로 만지는 것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가 요구되는 것도 비슷하다.”
-그래도 손에 기름 묻히는 일인데 힘은 들었을 것 같다.
“나는 괜찮았지만 아이들은 좀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서울대 나오고 오케스트라 단장까지 한다는 음악인 아빠가 기름때 묻혀가며 정비 일을 하고 있으니까 도대체 아빠 정체가 뭔가 했던 것 같다. 아들 하나는 나처럼 음악을 좋아했고 소질도 있었지만 정비 일 하는 (가난한)아버지를 보면서 음악하겠다는 마음을 바꾸겠다고 했을 때는 정말 눈물이 났다. 전적으로 밀어주지도 못할 거라 말리지도 못하고, 가슴이 많이 아팠다.”
- 애틀랜타에서만 음악 활동 30년이다. 보람이 있었다면.
“다민족 사회인 미국에서 음악으로 화합과 교감의 창구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게 큰 보람이다. 한인들에게도 위로와 자부심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또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 친구들에게 장학금을 주거나 연주 무대를 마련해 준 것도 기쁨이었다. 재주 많고 능력이 출중한데도 무대에 설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연주자들이 많은데 앞으로도 그런 친구들에게 실질적인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계속할 수 있다면 더 큰 보람이 없을 것이다.”
얘기를 듣다보니 금세 두 시간이 흘렀다. 한 마디 질문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쉼 없이 답변이 이어졌다. 음악 인생으로만 30여년을 달려왔고 또 그 만큼 쌓인 사연도 많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천성적으로 바지런하고 판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 만큼 지금의 코로나 상황이 몹시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이렇게 멈춰서 보기도 하고 지난 활동을 돌아보며 숨고르기도 할 수 있으니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 듯 싶었다.
코로나의 긴 터널도 이제 서서히 끝이 보이는 듯하다. 모두가 예전처럼 다시 활동하는 날이 오면 박민 단장은 또 어떤 프로그램으로, 어떤 날갯짓을 펼쳐 보일지 기대가 된다.
▶박민 단장은…
지휘자 겸 뮤직디렉터. 서울대 음대 기악과(80학번) 졸업. 1990년대 초반부터 조지아에서 음악활동을 했다. 애틀랜타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한인회관 건립 기금모금 음악회,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음악회 등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고 성황리에 이끌었다. 오케스트라 외에도 합창단, 음악학교, 아트센터 등도 함께 운영 중이다.
▶오케스트라는…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타악기 등 종류가 다른 여러 악기들을 한데 묶어 합주하는 교향악단이다. 관현악단이라고도 한다. 대부분 심포니(Symphony)나 필하모닉(Philharmonic)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유래는 조금 다르지만 큰 차이 없이 사용되고 있다. 심포니는 ‘함께 울린다’는 뜻이고 필하모닉은 ‘음악 애호가’라는 뜻.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로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1842년 창단)과 뉴욕 필하모닉(1842년 창단), 베를린 필하모닉(1887년 창단), 런던 심포니(1904 창단)등이 있다.
글·사진=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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