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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분자] 세 살, 한 살 아이 두고 '미래' 찾아 한국 떠나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4화> '간호사의 대모' 유분자
<1> 서른 두 살에 미국행 결심하다

미8군 KSC 병원 간호과장 재직 당시 시찰단들과의 회의. [유분자 이사장 제공]

미8군 KSC 병원 간호과장 재직 당시 시찰단들과의 회의. [유분자 이사장 제공]

15대1의 경쟁 뚫고 대전간호학교 입학
간호행정가 '꽃길' 포기 미국 병원 취업


1968년 12월11일.

53년 전 그날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꼬리날개에 노스웨스트항공 DC-7C이 적힌 비행기에 올랐다. 차창 밖 내리던 비처럼 진작부터 흐르던 눈물은 좌석에 앉자마자 왈칵 쏟아졌다. 한창 재롱부리는 세 살 딸과 첫돌을 갓 넘긴 아들이 어른거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어미가 돼서 이리 냉정한 결심을 했나.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이 더해 자책은 깊어졌다.



얼마나 울었을까. 폭우로 비행기가 일본에 비상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들렸다. 비행기 바퀴가 땅에 닿자 눈물은 거짓말처럼 멎었다. 일부러 작정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에 도착하고 나니 이제부터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현실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대한적십자사 초대 간호사업국장 재직 시절. [유분자 이사장 제공]

대한적십자사 초대 간호사업국장 재직 시절. [유분자 이사장 제공]

미국까지 갈 길은 아직 멀었다. 눈을 감았다. 이민을 선택해야 했던 서른 두 해 삶을 떠올렸다.

#백발 노신사, “뭉쳐야 산다”

1935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에서 3남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나보다 열살 위인 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그 시절 어린 나이에도 일제의 압박과 수탈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총각들은 학도병으로, 처녀들은 위안부로 잡아갔다. 시골사람들에게 해방이라는 말은 자유라는 어려운 단어보다 더 이상 끌려가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을 뜻했다.

해방되던 해 ‘그 날 그 자리’엔 어떻게 갔었는지 모른다. 동네 어른들이 줄지어 가는 길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을 수도 있다. 미국에서 귀국했다는 백발의 노신사가 광장의 연단에 올라섰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그는 신선처럼 보였다. 백발의 할아버지는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절규하듯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

광장을 메아리치던 이승만 박사의 절규와 청중들의 박수는 열살 소녀에게 ‘나’보다 ‘우리’를 각인시켰다. 이타적인 직업과 봉사하는 삶은 운명처럼 자연스러웠다. 16살에 대전간호학교에 입학했다.

#15:1 경쟁률, 백의를 입다

지금은 간호사가 되려면 대학을 나와야 하지만 당시에는 3년제 고교 과정만 마치면 정식 간호사가 될 수 있었다. 대전간호학교에 입학한 해는 1952년이다. 전쟁 통에 가난이 일상이던 시절이다. 대전간호학교는 학비, 숙식을 나라에서 지원해줬다. 공부 잘하는 재원들이 몰리는 건 당연했다. 줄곧 우등생이었던 나는 15:1의 경쟁률을 뚫고 20명 신입생에 뽑혔다.

동기 중 난 유일하게 퇴학당했다가 복학된 이력이 있다. 어릴 때부터 좋게 말하면 정의감, 나쁘게 말하면 ‘반골 기질’이 강했다. 부당한 일은 두고 보지 못했다.

사달이 난 건 부실하기 짝이 없는 학교 식단 때문이었다. 매일 꽁보리밥에 된장국만 먹었다. 동기생들을 모아 단체로 항의하자 학교 측은 주모자인 나를 퇴학하는 것으로 맞섰다. 간호학교 사상 초유의 퇴학 사건은 사흘 만에 없었던 일로 마무리됐는데 첫 번째 이유는 전교생이 교장 선생님께 내 복학을 요구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 덕분이다. 학교에서 쫓겨나길 각오했던 데모 소동에 급식은 많이 개선됐다.

동기생 20명 중 절반 이상인 11명이 지금 미국에 살고 있는데 만날 때마다 아직도 그때 내 무모한 용기는 수다의 단골 주제다.

#KSC 병원의 ‘박순천 여사’

간호학교를 졸업한 뒤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로 1년간 본격적인 실무를 익혔고 이듬해인 1956년 미8군의 노무자병원(Korean Service Corp·KSC)에 취업했다. 한국 전쟁 직후 미군은 전국 각지에 군사시설을 지으면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했는데 그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1953년 세워진 KSC였다.

노무자병원은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당시 한국의 어떤 병원보다 좋은 의약품이 흔하고 의료 시설이 뛰어난 곳이었다. 월급도 웬만한 종합병원보다 2배 많았다. 간호학교 때처럼 또 바늘구멍을 통과해 KSC에 취직했다.

하늘의 별을 딴 나는 내친김에 대학 진학의 꿈을 다시 키웠다. 낮에는 학원과 도서실에서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했고, 숙명여대 약대에 합격했다. 입학보다 어려웠던 건 학업과 직장의 병행이었다. 왕복 3시간씩 통학하고 낮에는 학교 다니고 밤번 근무가 계속되면서 늑막염까지 걸려 1학년을 마치고 학업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듬해 덕성여대 국문과에 편입해 3년 만에 학사모를 쓰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KSC에서 1967년까지 11년간 일하면서 대학 졸업장보다 더 큰 소득은 다른 세상들을 경험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은 철저하게 남성위주의 계급사회였다. 하지만 KSC 내에서만큼은 업무가 합리적이었고 여성에게 기회가 보장됐다. 취직 4년 만에 간호과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간호과장이 되면서 ‘박순천 여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순천(1898~1983) 여사는 여성 최다선(5선) 국회의원 기록을 가진 대한민국 여성 정치인의 시초다. 자유당 시절 부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남성 후보들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공격하자 “오죽 사내들이 못났으면 암탉이 나와서 이렇게 울어 대야 하는가”하고 응수했던 당찬 여성이었다.

박순천 여사처럼 난 타협하지 않았다. 한국인들 사이에 만연했던 취업 청탁을 사절했고, 관행 같았던 의약품 반출 비리에 일절 가담하지 않았다.

그렇게 탄탄하던 직장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건 1967년이다. 종전 후 10년 넘는 세월이 지나면서 미군 시설 공사가 마무리되자 한국인 노무자 수가 현저히 줄었고 KSC도 문을 닫게 됐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간호행정가, 미래를 찾아

KSC가 폐원한 뒤 대한간호협회 서울시 지부 사업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6개월이 지난 1968년 1월 갑자기 대한적십자사에서 차출 명령이 떨어졌다. 신설된 사업국장에 날 임명했는데 공무원으로 치면 이사관급은 되는 높은 자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초대 간호사업국장을 맡게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적십자사 세계본부에서 주최한 ‘가정 간호(Home Care)’ 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가정간호가 일반화됐지만, 그 당시 한국에는 가정 간호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세미나에 강사로 왔던 본부사업국장에게 열성적으로 질문을 던졌었는데 내 이름을 기억한 그녀가 날 한국 사업국장으로 추천한 것이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간호행정가의 자리에 올랐지만 근무 몇 개월만에 일할 곳이 못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KSC에서의 11년간 근무 경험이 사표를 낼 결심을 하게 했다. KSC는 내게 ‘미국의 맛’을 보게 했다. 미국 문화의 합리성과 포용성에 매료됐던 난 상명하복, 복지부동의 관행에 거부감이 심했다. 특히 여성을 하대하는 직장 분위기는 견디기 어려웠다.

간호학교 졸업 후 13년간 꽃길만 걸어오다 그제야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뼈저리게 눈에 들어왔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였다. 당시 어디서든 들려오던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는 역설적으로 암울한 현실을 뜻했다. 미래는 여기에 없었다.

미국 병원에 취업 원서를 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연세대 출신 간호사들이 여럿 텍사스 파크랜드 병원에 취업해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서를 냈고 취업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1968년 11월5일이었다.

그리고 한 달 1주일 뒤 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작은 가방 하나에는 간호영어사전과 옷 몇 벌, 고추장과 멸치볶음이 전부였고 주머니에는 달랑 300달러만 들어있을 뿐이었다.

눈을 떠보니 비행기는 LA 상공 위를 날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미국의 단맛은 짜디짠 땀 맛이었다. 상상하지 못할 고통이 곧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정구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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