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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의 첫사랑

오래전 국어 시간이다. 교과서에 나온 피천득의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다’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또 민태훈의 ‘청춘예찬’을 읽던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당시 나는 요즘 아이들의 성숙함과 달리 사춘기를 느끼지 못하던 조금 둔하고 순진하던 십대 소녀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 읽었던 문장들은 가슴에 뭉클하게 서서히 다가왔다.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꼭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피가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람의 풀이 돋고,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의 새가 운다.’

이처럼 피천득 선생과 민태훈 선생이 쓴 두 가지 예문은 매우 대비적이었지만, 훗날 나에게 많은 걸 깨닫게 했다. 학창시절 나는 문학적인 재능은 전혀 없었다. 성적도 뛰어나진 않았지만 국어 선생님께 많이 질문했던 학생이었다. 역사와 기하 시간을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는 영어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내 인생의 큰 사건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던 날 친정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서울대학 병원에서 무의식 상태에 들어갔다는 소식이었다. 친정아버지는 갓난아기인 나를 와이셔츠 속에 품고 동네 사람들에게 늘 자랑하셨다고 어머니는 나에게 들려주시곤 했다. 중풍으로 장애가 된 아버지로 인하여 붕괴된 가정은 나의 모든 자존심을 무너지게 했다. 죽음만 생각하던 방황의 나날이었다. 난 부잡스러운 두 사내들 사이에서 섬머슴처럼 자랐지만, 스스로 할 일을 잘했기에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1970년 부친을 잃으며 부자와 가난, 명예와 권력, 삶과 죽음, 병에 대한 고통 등 끝없는 의문들은 대학생인 내가 첫 수필을 쓰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가족과 사람들에 얽힌 인연과 업보를 탐구했다. 글을 쓰고 나의 치부를 고백하면서 삶을 뒤돌아보았다. 큰 안목으로 너그럽게 조금씩 성숙해 가야만 했다.

이민 초기에는 떠오르는 상념을 놓치기 싫어 가족이 잠든 새벽에 글을 몰래 쓰던 미치광이였다. 늦깎이 등단을 한 후 응원해주실 친정 모친도 안 계시니 힘이 빠졌고, 한 때는 글 쓰는 일도 사치스러운 것 같아 포기하고 싶었다.

은사이신 국어 선생님이 좋은 글은 사람이 된 맑은 영혼에서 흘러나온다는 격려 말씀을 떠올린다. 돈과 권력, 사이코들이 지배하려는 세상에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야 할지. 거짓으로 가득 찬 인간들의 음모를 여태 모르고 살아 온 어리석은 나. 지금이라도 함께 미쳐 돌아가면 안 되겠다. 손 전화에만 빠진 젊은이들은 너무 모르니 안타깝다. 그래도 역사와 진실을 알고 있는 분들이 아직도 살아 계시고 도덕을 지키려는 자랑스러운 후손을 기대하면서 글을 쓴다.

수필을 쓰는 일은 나의 운명인가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엮었던 첫 번째 수필집처럼 또 네 번째 책을 손수 마무리한다. 여러 번의 교정이 끝나고 표지의 구상이 끝나면 출판사를 찾는다. 느낌이 떠오르면 종이 위에 글을 쓰시던 부모님의 창의적인 일상처럼, 나도 그렇게 문학적인 삶의 향기가 내 영혼으로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전업주부로 살아 온 이후에도, 샌디에이고 마술 부엌에서 놀랍게도 꾸준히 수필과 함께 한 세월이 어느덧 50년이다.

수필은 나의 첫사랑이다.


최미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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