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정](9) 북한서 생환 노병 보고 '전우 구하기' 작전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3화> 국군포로에서 아메리칸 드림까지 토마스 정
<9>국군포로 송환 운동에 나서다
한인 정치인 필요성 절감 1.5세 후견인 역할
1994년의 어느날. 우연히 한국어 TV방송을 보다가 생뚱맞은 장면에 눈길이 갔다. 대한민국 육군 예복 차림에 소위 계급장을 단 노인이 누군가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었다. “군번 xxxxx. 육군 소위 조창호. 오늘부로 본대에 복귀하였음을 신고합니다.”
북한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해 40여 년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정전협정에 따라 양 측이 수용했던 포로들은 각자의 의사에 따라 모두 송환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난데 없이 포로라니.
그 노인(조 소위)의 말은 그러나 ‘픽션’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내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해댔다. 실종된 내 고향 후배 김용석 소위, 내 부하들, 내 동기생들…. 아직도 북녘땅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았다.
벌떡 일어나 상의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미국에 와서도 늘 품고 다녔던 육군종합학교(전시사관학교) 8기 동기생 명단이다. 199명 가운데 절반 가량이 전사 또는 실종자로 분류돼 있었다. “살아만 있어다오. 내가 꼭 구해줄게.” 나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전쟁이 터진 해 나는 소위로 임관해 강원도의 8사단에 배속됐다. 제 16연대 제1 대대 제 4중대(중화기 중대) 중대장. 8사단은 원래 유엔군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에 포위돼 전멸하다시피 했다. 재편성된 사단은 장교도, 사병도 대부분 신참으로 채워졌다. 전투경험이 거의 없어 리더십은 애시당초 실종상태였던 것.
우리 중대는 인민군과 교전을 벌이며 제일 먼저 양구에 진입했다. 험준한 산악지대여서 미군의 포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얼마나 치열했는지 고지의 주인이 밤과 낮으로 바뀌었다. 낮엔 국군이 점령하고, 밤엔 인민군에 빼앗기고.
그해 겨울은 한밤중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졌다. 방한복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탓에 병사들은 불을 지펴 몸을 녹였다. 이 바람에 적의 손쉬운 공격표적이 됐다. 이른바 ‘앉아 있는 오리(sitting duck)’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일 터다.
‘높은 분’들은 이미 전투가 시작도 되기 전에 도망쳐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고지를 사수했으니. 중대 병력 168명 가운데 생존자는 30명에 불과했다. 할 수 없이 철수명령을 내렸다. 어디쯤 내려왔을까. 부상병을 업은채 쓰러지고 말았다.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는 눈이 막 퍼붓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부하들은 내가 5분만 늦었어도 폭설에 묻혀 구조할 수 없었다며 하늘이 나를 살려줬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내 몸은 얼어 붙어있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구해 불을 지핀 다음 부하 여섯이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마치 통돼지 구이하는 것 처럼 나를 돌려가며 불에 쐤다고 한다. 피가 다시 흐르면서 의식을 되찾은 것. 나는 이렇게 부하들에 내 목숨을 빚졌다.
더욱 참담했던 건 내 연락병과의 엇갈린 운명이다. 중대장의 굶주림을 보다 못해 포위망을 뚫고 민가를 찾아갔다가 그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나 대신 전장의 이슬이 되어버린 연락병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나는 또 한번 좌절했다. 상관의 지시없이 후퇴했다며 나를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는 게 아닌가. 총살형 운운하며…. 맨 먼저 도망간 게 누군데. 이런 비겁한 자들이 전쟁을 지휘하다니 분노가 치솟았다.
또다시 살육의 현장에 내몰렸으나 이번엔 중상을 입었다. 왼쪽 다리 관통상을 당한 것. 결국 ‘상이군인’으로 분류돼 군을 떠나게 됐다. 1계급 특진과 함께 훈장도 달아줬지만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부조리가 판치는 군이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창호 소위의 갑작스런 출현이 나를 내 부하들 곁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나만 잘 살겠다며 미국에 온 내가 부끄러워졌다. 부하들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국군포로송환에 매달렸다.
한국의 여야 정치 지도자들을 두루 만났으나 죄다 ‘립서비스’ 뿐 실천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내게 힘이 되어줬던 유일한 분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꼭 북측에 국군포로송환을 요구하겠다며 믿어달라고 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노 전 대통령은 약속대로 국군포로 문제를 꺼냈다. 인도주의에 입각해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김정일은 아예 대꾸조차 안했다고 한다.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노 전 대통령에 마음의 빚이 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게 버팀목이 되어준 이는 ‘북한 인권투사’ 수잔 숄티 여사다. 우연히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만난 숄티는 무대를 워싱턴 의사당으로 옮겨 포로문제를 이슈화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2005년 4월 조창호 소위 등 포로 두 분을 자비로 초청해 연방의사당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북에 강제 억류된 국군포로들의 참상이 처음으로 미 정치권에 알려져 반향이 컸다. 2011년에는 연방하원이 전쟁포로 즉각 송환을 요구하는 결의안(HR 376)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포로송환에 적극 나서야 할 한국정부가 무관심으로 일관해 이제 포로송환운동은 접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북의 생존 포로는 많아봤자 150여 명 가량이다. 모두 90대의 노쇠한 분들이어서 북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 처지다. “살아만 있어다오”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이젠 저 세상에서나 만나 용서를 빌어야 할 것 같다. 약속을 못지켜 미안했다고.
포로송환 캠페인을 벌이면서 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숄티 여사와 같은 분은 드물었다. 돈이 없어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 못하고 있는 탈북 연극인의 딱한 사연을 듣고는 자신의 집을 저당잡혀 비용을 대 주기도 했다. 그 연극인이 내게 들려준 얘기다. 그래서 나는 그 분 앞에만 서면 왠지 작아지는 느낌이 들곤한다.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다는 숄티 여사다.
포로송환문제로 워싱턴을 수차례 오가며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 한국계 선출직 공무원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절감한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해 줄 우리의 의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한인 1.5세들의 정치후견인 역을 자임한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다.
박용필 전 논설고문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