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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정](8) 2003년 로즈 퍼레이드 '한인 꽃차'에 올인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3화> 국군포로에서 아메리칸 드림까지 토마스 정
<8>이민 백주년 사업에 뛰어들다

2004년 1월 13일 로스앤젤레스시 의회에서 미주 한인의 날 선포식을 열고, 윌셔 그랜드 호텔에서 제1회 미주 한인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중앙포토]

2004년 1월 13일 로스앤젤레스시 의회에서 미주 한인의 날 선포식을 열고, 윌셔 그랜드 호텔에서 제1회 미주 한인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중앙포토]

‘100년만의 일’ 호소에 주최측 절대 불가 입장 바꿔
2005년 연방의회 '한인의 날' 결의안 만장일치 통과


이민 백주년 기념행사는 모름지기 한인 커뮤니티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벤트였다. 예산을 편성해 보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80만 달러는 족히 필요했다. 내가 먼저 12만 달러를 냈다.

기금모금과 관련해 내게 감동을 준 분이 있다.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시다. “언론사는 무릇 커뮤니티의 친구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개인 돈 1만 달러를 보내왔다. 내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격려였다.

나는 동전 한 닢 허투루 쓰지 않았다. 식사 등 경비도 각자 부담을 원칙으로 했다. 너무 깐깐하다는 불평이 쏟아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 자신 한인단체들의 ‘행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또 봐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시계를 1960년대로 되돌려 보자. 이민이 본격화되기 전이어서 LA 한인인구는 유학생들이 고작이었다. 한인회(처음엔 한인센터로 불렸다)라고 해봤자 몇몇이 모인 친목단체에 불과했던 것. 모두들 가난해 회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초기 LA한인회의 후원자였던 백만장자 찰스 호 김.

초기 LA한인회의 후원자였던 백만장자 찰스 호 김.

한인회의 ‘물주’는 찰스 H. 김(한국명 김호). 한인 이민 역사상 처음으로 백만장자의 반열에 오르신 분이다. 그 분이 한인회관 건립기금으로 1만 달러를 내놨다.

그런데도 한인회는 돈이 떨어지면 그에게 손을 벌렸다. “모이면 싸움질만 하는데 내가 왜 당신들한테 돈을 줘야 하느냐”고 호통을 쳤지만 며칠 후엔 슬그머니 또 돈을 보내왔다. 그 돈을 아껴 쓰기는커녕 먹고 마시며 탕진하기 일쑤였다. 한인회를 자신들의 클럽하우스쯤으로 여겼다고 할까.

찰스 김은 김형순과 함께 ‘김 브라더스’를 설립, 농장을 기업화해 부를 일궜다. 두 사람이 친형제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피한방물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그런데도 계약서 한 장 없이 평생 비즈니스를 함께 했으니 시쳇말로 ‘연구대상’이라고 해야 할지.

며칠 전엔 그 분과의 인연을 떠올리게 하는 기사를 읽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한국서 씨 없는 포도가 인기를 끌고 있다며 이젠 한국이 보유한 종묘가 일본을 제치고 세계 5위권으로 부상했다는 내용이다.

사연은 이랬다. 1960년대 초 한국의 지인 한 분이 내게 씨 없는 포도 종묘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문의해 왔다. 찰스 김으로부터 종묘를 얻어 곧바로 보냈다. 씨 없는 포도는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에 처음 보급된 것이다. 나도 한국의 종묘산업에 일조를 한 것 같아 뿌듯해 진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이민백주년 기념사업의 하이라이트는 패서디나의 로즈 퍼레이드 참가다. 미 전역에 생중계되는 신년맞이 최대규모의 축제여서 우리 이민역사를 홍보하는데 이 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을 터다.

행사를 주관하는 패서디나 상공회의소 측에 참가의사를 밝혔다. 뜻밖에도 회신은 ‘절대 불가.’ 최소 5년 전엔 신청해야, 그것도 심사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이유를 댔다. 한마디로 ‘꿈 깨라’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한인 커뮤니티로선 백년만에 한 번 맞는 경사라며 로비를 벌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백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감동을 줬는지 주최 측으로부터 특별 허가가 떨어졌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그날 밤잠을 설쳤다.

현장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꽃차 제작에 매달렸다. 한인학생들이 성탄절 휴가를 반납해 가며 자원봉사를 해줘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성서에 나오는 ‘사랑의 수고(labor of love)’는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꽃차 장식은 규정상 모두 생화를 쓰게 돼있다. 전세계의 장미란 장미는 모두 로즈 퍼레이드에 동원된다는 얘기가 결코 우스개는 아니란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또 하나 꽃차와 관련해 중앙일보에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코리안 로즈 퀸’을 선발해 꽃차에 태우자는 안을 내놨다. 주최 측은 그러나 ‘로즈 퀸’은 퍼레이드의 심볼이나 다름없어 어느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퀸’을 뽑기는 뽑아야 하는데…. 신문사 측에서 ‘센테니얼 퀸(Centennial Queen)’을 제안했다. ‘(이민) 백주년의 여왕’이다. 중앙일보 측은 선발전을 통해 ‘퀸’ 한 명과 ‘프린세스’ 4명 등 모두 5명을 뽑았다.

미인선발대회가 아니어서 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이민사 숙지 여부 등을 심사해 뽑았다. 이들은 꽃차 탑승은 물론 그해 한인 커뮤니티의 홍보사절로 활동해 백주년을 맞는 우리 이민역사를 주류사회에 두루 알렸다. 프린세스 중에는 미 육사(웨스트포인트) 출신도 포함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꽃차에는 이외도 박찬호(LA 다저스), 로널드 문(하와이주 대법원장) 등 한인사회를 빛낸 인물 29명이 탔다. 새해 첫 날 백만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이민 백주년 꽃차가 밴드를 앞세워 퍼레이드에 나서자 나는 울음을 삼켰다. 나 보다 앞서 살다 간 이민 선배들이 생각나서다. 그 분들이 오늘의 이 장면을 봤으면 얼마나 감격해 했을까.

대망의 2003년 1월 1일은 꽃차 퍼레이드로 마감했지만 내겐 또 마지막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백년 전 1월 13일, 우리 선조들이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처음 미국 땅을 밟은 그 날을 영구 기념일로 제정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연방의회에 냈다.

‘꿈은 꾸는 게 아니라 이루는 것’이라고 했던가. 2년 후 결국 꿈이 성취됐다. 에드워드 케네디, 대니얼 이노우에, 조지 앨런, 딕 더빈, 시어도어 스티븐스 상원의원 등이 우리의 요구를 결의안으로 만들어 상원 전체 회의에 올렸다.

2005년 12월 16일, 결의안(S. Res. 283)은 표결없이 구두로 만장일치 통과됐다. 이후 매년 1월 13일은 ‘코리언 아메리칸 데이’로 지정돼 해마다 빠짐없이 경축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결의문에는 찰스 김의 공적도 들어가 있다. 미국 최초로 넥타린(털없는 복숭아) 묘종을 개발했다는 내용과 함께. 이외도 제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 김영옥 대령,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 박사 등 한인 이민 역사의 아이콘들이 결의문에 포함됐다.

결의문을 받아든 날 나는 이렇게 빌었다. “선배님들이여, 당신들의 땀과 열정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박용필 / 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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