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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앤 테크놀로지] 관객참여형 현대미술

Li Mingwei‘s Sonic Blossom, performed a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Gallery 915 on November 8, 2015. Photo by Lara Donahue.

Li Mingwei‘s Sonic Blossom, performed a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Gallery 915 on November 8, 2015. Photo by Lara Donahue.

참여형 미술(Participatory Art)이라는 말이 현대미술의 주요 화두로 떠오른 지 20년이 넘은 것 같다. 70년대의 퍼포먼스 아트에서는 관객 앞에서 음악이나 무용 공연처럼 미술 작가가 현장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백남준, 요셉 보이스, 요코 오노, 존 케이지의 작품을 보러 가면 관객의 참여가 어느 정도 기대되었다. 1952년 선보인 존 케이지의 작곡 ‘4분 30초’는 연주자들이 연주하지 않고 4분 33초의 적막을 대중들이 여러 가지 소음으로 채우는 참여형 미술이었다.

그런 관객 동원과 21세기의 참여형 미술이 다른 점은 관객들이 공동 창작가 혹은 편집가 등으로 위상이 올라갔다는 점이다. 이전의 퍼포먼스 아트에서는 수동적 관객, 실마리를 모른 채 초대된 관객들을 놀라게 하거나 억지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기도 하였다. 요코 오노의 실험 미술 컷 피스(Cut Piece)는 1964년 초연된 이후로 비디오 녹화를 통해서 많이 관람 되었다. 초연 이후 40년 만인 2003년 파리에서 한참 세월이 흐른 모습의 요코 오노가 재연을 하기도 하였다. 소극장에 초대된 관객들은 차례로 무대 위로 올라서 가위로 오노의 옷 부분을 잘라내도록 요청받는다. 전쟁의 참화와 폭력의 무자비함을 백 마디 말보다 강렬하게 표현한 것이다. 별다른 소리 없이줄 서서 올라온 관객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옷을 자르는 행위는 보는 이들에게 총과 칼, 혹은 가정폭력 같은 모든 종류의 억압이 얼마나 처참하게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파멸시킬 수 있는지 목격하게 된다.

최근 나타난 참여형 미술은 이보다는 관객에게 부여하는 권한이 더 크다. 작품의 기획단계부터 유동적인 진행 과정과 열린 결말로 출발하기에 작가 자신도 기획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지 못한다. 관객의 대응에 따라서 작가의 계획이 수정되기도 하고 뜻한 바와는 전혀 다른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대만 출신의 미국 작가 리 밍웨이(Lee Mingwei)의 작품 ‘소리의 꽃(Sonic Blossm)’은 미술관을 구경하러 온 아무 관객에게 다가가 직접 불러주는 노래를 듣고 싶은지 물어보고 거절이나 승낙을 구한다. 생각보다 많은 관객은 거절하고 돌아선다. 공공의 장소인 미술관 갤러리 안에서 누군가 자기를 의자에 앉히고 그 앞에서 노래 불러준다는 상황이 부담스럽다. 곡목이 슈베르트의 가곡인 것도 선호도를 자극할 것이다. 만약 승낙하면 관객은 편안하게 앉아서 꽃다발을 선사 받는 것처럼 노래의 선물을 받게 된다. 인종과 나이, 성별과 종교를 초월하는 이런 만남이 어떤 이들에게는 무한한 파토스의 순간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왜 슈베르트의 가곡만 되고 다른 것은 안되는지 분석하기도 한다. 리 밍웨이는 대만에서 어린 나이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여 17년 정도 음악 수업을 받았다. 슈베르트 가곡은 발레를 공부하던 어머니가 즐겨듣던 노래였다. 노래를 부를 공연자들은 미리 오디션을 통하여 선택하는데 전문성악가도 있지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아마추어나 학생들도 뽑힌다.



2013년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을 시작으로 2014년 베이징 현대미술센터(당대 미술 중심)와 도쿄 모리 미술관에서, 201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보스턴에서 공연되었고 2018년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 2019년에는 클리블랜드 미술관, 2020년 워싱턴의 국립초상갤러리 등을 순회하며 공연되고 있다. 마치 순회공연을 하는 악단처럼 이 전시는 그 지역의 관객과 공연자를 중심으로 창작이 진행된다. ‘미술관’ 안에서 공연한다는 기획은 바뀌지 않는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공연된 장면들은 ‘특별전’처럼간주하여 미술관의 아카이브에 보관된다. 이 기획에서 물질적으로 남아있는 요소는 없다. 무형의 ‘소리’를 전달받은 이들의 감동은 눈에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2019년 아이칸(AICAN)이라는 이름의 인공지능이 제작한 프린트 작품들이 뉴욕 첼시의 한 갤러리에서 전시되었다. 2018년 크리스티 경매회사에서는 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s)이라는 기술의 인공지능이 만든 ‘에드몽 드 벨라미의 초상(Portrait of Edmond de Belamy)’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43만 달러(한화로 4억6000만원 정도)에 거래되었다. 여러 가지 사례 및 데이터를 받은 인공지능은 스스로 배움을 계속하여 스스로 이해한 개념과 기준에 맞는 새로운 창조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뉴저지 럿거스 주립대학교의 컴퓨터공학과 교수인 아메드 엘가말(Ahmed Elgammal)이 개발한 아이칸 인공지능은 추상화의 기법을 이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테크놀로지가 발전할수록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느낀 창작 혹은 창의적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과연 인공지능에 다가가 슈베르트의 가곡을 불러주겠다고 했을 때 승낙을 할까 거절을 할까? 당황스러움, 쑥스러움, 음악에 관한 선호도의 차이, 일정의 분주함 등을 고려하는 사람 관객과 인공 지능의 결정 요소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다. 참여형 미술의 사회적, 미학적 발자취를 지켜보도록 하자. 곧 인공 지능도 참여형 미술 작품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변경희 / 뉴욕주립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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