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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정](7) "좋은 친구와 직원들은 나의 재산목록 1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3화> 국군포로에서 아메리칸 드림까지 토마스 정
<7>대주주로 한인은행에 뛰어들다

토마스 정 회장이 이민 100주년 기념 2003년 로즈 퍼레이드 참가 관계자 회의를 주제하고 있다.

토마스 정 회장이 이민 100주년 기념 2003년 로즈 퍼레이드 참가 관계자 회의를 주제하고 있다.

2003년 1월 1일 이민 1백년의 영웅들과 함께 꽃차에 탑승하기 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프로야구 텍사스 레인저스의 박찬호 선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 박사, 소피아 최 CNN 앵커, 김영옥 예비역 대령,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 태미 정 류 판사, 문대양 하와이주 대법원장, 언론인 이경원씨, 프로축구 LA 갤럭시의 홍명보 선수.

2003년 1월 1일 이민 1백년의 영웅들과 함께 꽃차에 탑승하기 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프로야구 텍사스 레인저스의 박찬호 선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 박사, 소피아 최 CNN 앵커, 김영옥 예비역 대령,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 태미 정 류 판사, 문대양 하와이주 대법원장, 언론인 이경원씨, 프로축구 LA 갤럭시의 홍명보 선수.

지인들 덕에 이민 100주년 사업 성공적 진행
묵묵히 일해주는 장기 근속 직원들에 감사


30년 전 내가 미주은행(나라은행의 전신)에 투자한 돈은 30만 달러다. 은행감독국이 요구한 자본충당금 150만 달러 가운데 5분의 1을 내가 맡은 셈이다. 1주 당 3 달러에 모두 10만 주를 배당받아 대주주가 됐다.

주주로 참여하신 분들 가운데는 다운타운에서 의류 봉제로 사업을 키운 분들이 많았다. 우병우, 김탁, 김용환씨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낸 분들이다. 내가 이사장을 맡아 은행 살림을 꾸렸다.

벤자민 홍 행장의 뛰어난 경영수완으로 은행은 매년 35%씩 성장을 거듭했다. 주가도 당초 3 달러에서 4 달러, 20 달러, 주식 분할도 세 차례나 이어졌다. 훗날 내가 이사를 그만 둘 때는 주식이 27 달러까지 뛰었다.



직원들도 신이 나 열심히 일했다. 어느핸가 연말 파티에서 일어난 해프닝이다. 어느 부장이 툴툴댔다. 은행 측이 준비한 선물꾸러미가 성에 안찼던 모양이다. ‘은행이 누구땜에 이 만큼 컸는데…’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순간 나도 모르게 버럭했다. “주식회사는 누굴 위해 존재합니까.” 갑작스런 내 질문에 모두 당황한 듯 했다. “주주의 이익입니다. 주주….” 나는 주주를 몇번이나 되뇌었다.

다 망해가는 회사를 살린 건 주주들의 투자 덕분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좀 살만해졌다고 흥청망청 쓰면 주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따끔하게 일러줬다. 내 ‘훈계질’이 먹혔는지 이후 은행 파티는 조촐하고 검소하게 치러졌다.

이사장 재임시 내가 ‘군기’를 잡은 일이 또 하나 있다. 회의시간 엄수다. 이사들은 각자 생업이 있어 회의는 주로 저녁 7시에 열렸다. 그런데 제 시간에 오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10분, 20분, 심지어 1시간 늦게 와도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이른바 ‘코리안 타임’이 몸에 배였다고 할까.

담당 직원에게 7시 정각이 되면 문을 걸어 잠그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부 이사들은 내가 너무 ‘빡빡하다’는 푸념을 해댔지만 나는 시간 문제 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거래선과 계약을 맺는 자리에도 10분 늦게 나타날 것인가”하며 큰소리를 냈다. 내게 시간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재산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지각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밝히자 얼마안가 이사회가 정시에 열리게 됐다. 늦기는커녕 10분 일찍 와 그날 토의할 아젠다를 미리 점검하는 등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은행업무 쇄신에 큰 기여를 했다고 감히 자부한다.

매해 목표치를 상회하는 실적을 올리다 보니 은행 몸집이 커졌다. 다음 단계는 인수합병(M&A). 한인은행으론 처음으로 M&A에 나섰다. 인수하는 쪽이 아무래도 합병을 당하는 쪽보다 우위에 있는 건 사실이다. 지점도 통폐합되는 등 물갈이 대상의 폭이 커진다. 합병대상 은행장은 당연히 퇴직 제 1호다.

한미은행과의 인수합병을 추진할 때 얘기다. 양측 이사들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이때 유재환 당시 한미은행장이 나를 찾아왔다. “이사장님, 합병을 더 강력하게 밀어붙이세요.”

유 행장의 주문에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합병되면 유 행장 자신의 목이 제일 먼저 날아갈텐데…. 유 행장은 그러나 커뮤니티 은행이 성장하려면 합병 외엔 대안이 없다며 자신의 거취따위는 고려하지 말라고 했다.

이후 공교롭게도 유 행장이 맡은 은행이 또 다시 나라은행의 공격목표가 돼 얼마나 미안했든지. 그래도 불쾌한 내색하지 않고 내게 합병을 권했다. 연배로는 내 조카뻘이지만 나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 분의 '됨됨이’를 존경한다. 모임이 있을 때는 꼭 유 행장을 상석에 앉힌다. 내겐 그가 ‘어르신’이다.

박창규 전 한미은행 이사장은 나의 영원한 ‘주치의’이시다. 내가 몸이 아파 전화를 걸면 한밤중, 새벽녘이라도 한걸음에 달려온다. 약사 출신이어서 의학상식이 웬만한 의사 뺨칠 정도다. 내겐 말년에 믿고 의지하는 몇 안되는 친구 중 한 분이다.

윌셔은행의 고석화 전 이사장은 한마디로 ‘젠틀맨’이다. 매사에 맺고 끝는게 분명한 분이다. 내가 미주한인이민 백주년기념사업회를 맡고 있을 때다. 한인은행들을 찾아 다니며 기금을 모았다. 은행마다 1만 달러를 냈는데 윌셔 은행만 5000 달러를 고집했다. 그러자 고 이사장이 선뜻 5000 달러를 개인체크로 내 1만 달러를 맞춰줬다. 얼마나 고마웠든지. 새크라멘토에서 열린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미주한인의 날 기념 선포식에는 나 대신 참석해줘 지금도 감사할 따름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살아오면서 이처럼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내게 재산목록 1호를 대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친구들을 꼽는다. 그래서 옛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명언을 남겼지 않나 생각이 든다. ‘친구는 제2의 자신이다(A friend is a second self)’. 나는 2500년이 지난 오늘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니 뭐니해도 묵묵히 내 뒷바라지 하는 회사(His & Her Hair) 직원들이야 말로 내가 가장 신뢰하는 친구들이다. 게중에는 거의 40년을 나와 함께 동고동락한 분도 있다. 그는 중학생 때 이민와 대학졸업후 첫 직장이 지금의 내 회사다. 30여 직원들의 평균 근무연수는 거의 20년을 헤아린다. 우스개로 ‘등 떠밀며 나가달라고 해도 절대 안나가겠다’는 분들이다.

며칠 전 거의 1년 만에 회사에 나갔다. 중앙일보 사진기자의 취재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을 우려한 직원들이 내 출근을 극구 말렸는데도 '기자 탓’하며 회사를 들렀다. 유럽에서, 뉴욕에서, 곳곳에서 걸려오는 전화주문, 온라인 오더에 바삐 움직이는 그들이 무척 고마웠고 대견했다.

따지고 보면 지난 2003년 새해 첫날 미주한인이민 백주년기념 꽃차가 로즈 퍼레이드를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었던 것도 회사 직원들의 땀이 맺은 열매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성 싶다. 솔직히 말해 한인커뮤니티에서의 내 활동은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줬기에 가능했을 터다.


박용필 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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