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정](6) 한인상권·틈새시장 가능성 보고 한인은행 투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3화> 국군포로에서 아메리칸 드림까지 토마스 정
<6> 틈새시장 가능성, 한인사회서 찾다
영화포레스트검프보고민물장어수출도전
할리우드의 대박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내게 니치 마켓(niche market)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작품이다. 니치 마켓은 수요는 있는데 공급이 틈새처럼 비어있는 시장을 일컫는다.
내게는 주인공 검프(톰 행크스 분)와 그의 절친 버바(마이켈티 윌리엄슨 분)와의 대화가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다. 베트남의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버바는 검프에게 제대 후 새우잡이 창업을 제안한다. 회사는 두 사람의 이름을 딴 ‘버바 검프 슈림프 캄퍼니’.
“새우는 바다의 과일 같은거야. 바베큐도 해먹고, 삶아도, 구워도 먹고, 센 불에 재빨리 볶아도 먹고….” 대화의 방점은 ‘바다의 과일(the fruit of the sea)’에 찍혀있다.
버바는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출신. 그의 끝없는 새우 예찬에 검프는 흔쾌히 동의한다. 그러나 제대를 앞둔 어느날, 친구는 적의 기습공격으로 치명상을 입는다. 검프의 가슴에 안겨 눈을 감는 버바. 검프는 전우와의 약속을 지킨다. 새우잡이 회사를 차려 백만장자가 되고….
뉴올리언스는 바닷물과 민물이 합쳐지는 곳이어서 어족이 풍부하다. 장어는 멀고 깊은 바다에서 산란하지만 새끼가 부화하면 바다를 거슬러 어미가 살던 하천으로 되돌아온다. 연어와는 반대로 회귀하는 어족이다.
미국인들은 장어를 뱀으로 여겨 먹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 유럽 등지에선 장어가 고급어종이다. 새우는 어림도 없겠지만 장어 만큼은 미국인들과 경쟁이 거의 없어 틈새를 노려볼만 했다. 내게는 장어가 ‘바다의 과일’인 셈이었다.
영화 속의 주인공 검프처럼 뉴올리언스로 달려갔다. ‘민물장어의 꿈’을 안고서. 과연 듣던대로 ‘물 반, 장어 반’이었다. 뉴올리언스에서 두 달을 넘게 지내며 ‘장어 대박’의 꿈에 한껏 부풀었다.
장어 ‘트랩’ 구입과 양어장 마련 등 시설 투자에만 5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장어는 포획보다 판로 개척이 예상외로 쉽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에선 생태계 파괴를 우려해 활어 반입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싱싱해야 제 값을 받을 수 있는데.
궁여지책으로 유럽시장을 뚫기로 했다. 무작정 네덜란드의 미국 대사관을 찾아간 것. 경제담당 영사를 만나 도움을 청했다. 1주일 뒤 면담 날짜가 잡혔다.
약속한 시간을 정확히 지킨 영사는 내게 두툼한 서류봉투를 건넸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얼마나 시장조사를 철저히 했는지 보고서엔 나라 별 장어 수요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그때 무릇 공직자의 자세는 이런거구나 실감을 했다. 영사는 일면식도 없는데도 자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가끔 한국서 고위 관리의 처신이 논란이 되는 기사를 읽으면 그 미국 외교관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물장어의 꿈’은 이런 저런 장벽에 막혀 결국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장어를 통해 얻은 수확은 결코 적지 않았다.
뉴올리언스에서 두 달을 지내며 장어를 거의 매일 먹다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날 흐릿하게만 보였던 TV 스크린이 또렷하게 닥아왔다. 어, 이게 웬일. 이번엔 신문을 펼쳤다. 내가 기사를 읽을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장어가 내 시력을 거의 정상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그 때의 그 기쁨이란. 한편으론 슬픔이 밀려왔다. UCLA의 경제학 박사학위가 어른거려서다. 대학병원 의사가 실명의 위험이 있다며 내게 박사과정 포기를 강권했지 않은가. 내가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가끔 궁금해지기도 한다. 아마 귀국해서 교수를 하다가 은퇴, 지금쯤 백수로 지내고 있을지 싶다.
나는 지인들과 외식을 하게 되면 주로 장어덮밥, 장어구이 등을 시켜 먹는다. 그러면 ‘저 나이에 아직도 정력을?’ 눈총 받기 십상이다. 내게 장어는 정력 보양제가 아니라 시력 강화제인데…. 요즘도 주 2~3회 정도는 집에서 장어를 구워먹는다.
‘민물장어의 꿈’에서 깨어난 나는 또다시 니치 마켓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번엔 전공을 살려 커뮤니티 은행 쪽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20년 전만 해도 한인은행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지만 성장가능성이 꽤 높아 보였다. 한인인구가 꾸준히 유입되고 한인상권이 날로 커지고 있어서다.
내게 처음 은행투자를 권유한 분은 벤자민 홍 행장이다. 우연한 기회에 골프를 함께 쳤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골프채가 매우 낡아 보였던 것. 은행장 정도 됐으면 유명 브랜드의 클럽을 가질만도 한데…. 왠지 모르게 그의 골프채에 마음이 끌렸다.
얼마 후 홍 행장이 집에 찾아왔다. 투자 유치를 위해서다. 처음엔 완곡하게 거절했다. 다 망해가는 은행(당시 미주은행)에 뭔 투자? 은행에 관심은 있었으나 미주은행은 아니었다.
훗날 알게 됐지만 벤자민 홍의 미주은행 행장 취임은 ‘배짱’이 작동한 결과물이었다. 은행 측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자 시쳇말로 ‘쎄게’ 불렀다. 쓰러져 가는 은행이어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연봉도 적정가의 2~3배를 요구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그의 배짱이 은행을 살려냈을 뿐더러 한인은행의 대형화에 주춧돌을 놓았다.
은행 측은 그런데도 그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사태가 워낙 급박했던 탓이다. 당시 미주은행은 자본금을 거의 다 까먹어 파산직전이었다. 은행 감독국은 150만 달러 이상의 자본금 충당을 요구한 상태. 기일 내 마무리 짓지 못하면 은행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울며겨자 먹기로 홍 행장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졸지에 좌초 직전의 은행을 떠맡게된 홍 행장은 당장 투자자들을 끌어들여 급한 불을 꺼야 했다. 소방수 제 1호로 나를 ‘찜’한 것이다.
내가 거부의사를 밝혔는데도 홍 행장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홍 행장의 끈질긴 권유로 미주은행에 발을 디디게 된다.
나의 은행을 상대로 한 니치 마켓 도전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전열을 정비한 미주은행은 나라은행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새 역사를 쓰게 된다.
박용필 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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