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정](4) 4700불 가격표 보고 뛰어든 가발사업 대박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3화> 국군포로에서 아메리칸 드림까지 토마스 정
<4> 인생의 변곡점을 만나다
가발로 돈 벌어 한국 국회의원된 이도
‘엿장수 맘대로’라는 우스개가 있다. 어릴 적 가장 반가웠던 손님은 뭐니 뭐니해도 ‘엿장수’였을 거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절겅대는 가위소리가 들려오면 약속이나 한듯 쪼르르 달려가 엿장수 뒤를 따랐다. 오는 날짜도, 가위질 하는 것도 ‘엿장수 맘대로’였지만 늘 반갑기 그지 없었다.
엿장수는 현금은 물론 안받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 다 떨어진 고무신 한쪽, 양은 냄비하며…. 가끔 “재는 왜 많이 주고 난 쬐끔만 주나요” 항의하면 “야, 엿장수 맘이여”하며 꿀밤을 주기도 했다.
엿장수가 가장 좋아했던 물건이 바로 여자 머리카락이었다. 짧은 머리는 아예 받아주지 않았다. 긴 머리를 갖고 오면 엿을 한 뼘이나 더 잘라 줬다.
1960년대 한국의 외화벌이는 엿장수가 수집해온 머리카락이었다. 내가 처음 머리카락을 수입해 미국 가발회사에 팔았다. 처음 납품했던 곳은 ‘맥스 팩터(Max Factor).’ 하일랜드와 할리우드 불러바드 코너에 있었는데 지금도 건물이 남아있다. 회사는 이미 망한지 오래 됐지만.
몇 주 후 납품 날짜에 맞춰 회사를 찾았다. 이왕 온김에 ‘아이쇼핑’이나 하자며 쇼윈도를 다시 둘러 본 것.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두 눈을 씻고 봐도 가격은 그대로 였다. $4,700! 지난번 가격표는 내가 잘못 본 것이었다. 47달러도 비싼데 세상에 4700 달러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저걸 누가 사나. 할리우드 수퍼스타 쯤이나 돼야 살지 모르겠다.
그날부터 머리카락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저걸 내가 가발로 만들어 팔면…. 생각만해도 가슴이 부풀어오르며 온몸이 짜릿해졌다.
뜻이 있는 곳에 정말 길이 있는걸까. 얼마 후 회사 매니저로부터 머리카락을 직접 공장에 갖다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버뱅크 공장에 머리카락을 넘기며 사정을 했다. 무보수라도 좋으니 일을 하게 해달라고.
공장장은 내 속셈을 알아챘는지 일언지하에 퇴짜를 놨다. 나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아무리 뜻이 있어도 길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국서는 가발 붐이 일어나기 전이어서 도움받을 곳이 전무했다. 그때 문득 ‘사무라이’가 떠올랐다. 일본 무사의 머리에 두른 것이 가발일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친 것.
토쿄와 오사카 두 곳 상공회의소에 편지를 썼다. 한 달 후 쯤 토쿄 상의에서 회신이 왔다. 여기서 에피소드 한 토막. 나는 편지를 영어로 썼는데 답장은 일본말로 쓰여져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세계화가 안돼 있었던 모양이다. 그 큰 상공회의소에 영어편지 하나 쓸 줄 아는 직원이 없다니.
토쿄 상의가 한 군데를 소개해줬다. 그 회사에 샘플 하나를 주문했는데 12달러 50센트를 선불로 주면 곧 보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우여곡절 끝에 가발을 손에 쥐었다. 이게 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구나. 4700 달러가 눈에 어른 거렸다.
문제는 판로. 이걸 어디에다가 팔지? 샘플을 들고 무작정 미장원을 돌았다. 대부분 가발을 처음 본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막막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어떻게 입수한 가발인데.
내 가발의 ‘진가’를 알아 준 곳은 샌디에이고의 어느 고급 미용실. 남자 미용사가 나를 맞았다. 아래 위를 훑어 보더니 ‘헤어컷을 하러 왔느냐’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동양인이, 그것도 꾀죄죄한 차림을 하고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겠다.
가발을 살 생각이 있느냐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갑자기 미용사의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가격이 얼마냐’고 관심을 보인 것. 나는 ‘얼마면 사겠냐’고 되물었다. 500 달러를 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맥스 팩터 제품은 4700달러인데. 아쉬움은 있었지만 원가($12.50)를 생각하면 40배가 넘는 장사다.
미용사가 내가 갖고 있는 걸 다 팔라며 ‘현금박치기’를 제의했다. 지금은 샘플밖에 없지만 몇 개가 필요한지 알려주면 한 달 후 그 물량을 맞춰주겠다고 했다. 미용사의 주문량은 24개. 곧바로 머리를 굴려 계산을 해봤다. 일본 메이커에 줄 돈은 300 달러. 내게 떨어지는 돈은 자그마치 1만2000 달러. ‘야호!’ 내게도 이런 재물운이 있다니.
그런데 일본회사와는 첫 거래여서 선금을 줘야했다. 내게 그만한 돈이 있을리 없었다. 롱비치 대학시절 친하게 지냈던 이도제에게 급전을 빌려 송금했다. 물건은 약속한 날짜에 배달됐다. 한껏 꿈에 부풀어 샌디에이고로 씽씽 차를 몰았는데 그 미용사가 배신을 때릴 줄이야. 가격을 500 달러에서 절반으로 후려치는 게 아닌가. 꼼짝없이 그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고 말았다. 마땅히 팔 곳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개당 250 달러를 받고 몽땅 처분을 했다. 그래도 6000 달러나 되는 돈을 벌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초창기 시절 가발과 관련한 해프닝이 적지 않았다. 그중 압권은 조 모씨가 운영했던 가게. 가발 하나를 99 달러에 판다는 세일 광고를 LA 타임스에 실었다. 피코에 있던 그의 가게가 인파로 넘쳐났다. 나중엔 기마경찰이 출동하는 코미디까지 빚어진 것.
그는 가발을 재봉틀로 누벼냈다. 가격이 경쟁력이 있다보니 특히 흑인들이 주고객이 됐다. 부실공사를 한 때문이었는지 반품소동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그 무렵 조씨가 가발로 떼돈을 벌었다는 루머가 한인들 사이에 퍼졌다. 그는 한국에 가 소원대로 금배지를 달았다. 여당 실세에게 40만 달러를 줬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정계에서 강제 퇴출당해 다시 LA로 돌아왔다. 가발과 관련한 ‘웃고픈’ 얘기가 어디 하나 둘일까.
머리카락에서 가발까지. 미국에서 나의 삶은 그렇게 자리를 잡았다.
박용필 / 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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