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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의 아메리칸 저니 #9]DC 한인상인 미망인의 절규 “이렇게 가면 어떻게!”

#돈 없고 못 배운 죄
“아빠 이렇게 가면 어떻게, 돈 없고 못 배운 죄라면 나도 같이 가야지!” 어린 아들 손을 놓고 땅바닥에 엎드려 울부짖는 젊은 미망인의 절규는 처절했다.
음산하리만큼 축축히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파헤쳐진 땅속으로 내려가는 관(coffin)은 무심하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무리 법전을 뒤져보아도 ‘돈 없고 못 배운’ 이란 죄목은 없었다.

1984년 초겨울, 흑인 강도의 총탄에 절명한 젊은 한인 상인의 장례식은 그 이후 내가 경찰 생활하며 참석했던 수많은 DC한인 상인들의 참담한 장례식 중 하나였다.
우리는 왜 그토록 위험한 DC 빈민가에서 귀중한 목숨을 담보로 장사했을까?
살인강도가 난무하던 시절 매상에 비해 가게 값 싸고 임대료 싼 곳이 흑인 빈민가였다. 영어 잘하고 배운 것 많으면 미국 직장 다니면 될 일이었지만 영어 서툴고 배운 것 없으면 미국인들이 다니는 직장에 다닐 수 없었고 돈이 없으면 안전한 백인동네에서 장사할 수가 없었다.

선택이란 돈 있고 배운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었다. 그냥 파묻고 싶은 이야기들... 그러나 그것들 역시 우리 역사다. 불편하시더라도 들어주시기 바란다.

#찬란한 성공과 끝없는 추락
한밤의 별빛이 찬란한 이유는 별빛이 그 시간에 더 빛나서가 아니라 어둠이 더 짙게 내려져 있기 때문이며, 모닥불의 잔재(ember) 앞을 우리가 아직 못 떠나는 이유는 그 잔재의 따스함 보다 우리 가슴이 아직 차갑기 때문이 아닐까?
7080시대 우리 이민 역사는 짧았다. 막상 이민은 왔지만 빈손으로 시작한 미국이민 생활 그러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칠흑같은 어둠을 헤쳐 나가는 시기에 수많은 상처를 받으며 살았다. 모르면 부딪치라고 했던가. 그래서 짱돌이 콘크리트 벽에 부딪치 듯 들이받으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비극들이 있었다.

#Prologue에서 “the story”로
그동안의 스토리들은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본론에 이르는 여행이다.
우선 이글은 주관적인 글이다. 이해하시기 바란다. 둘째, 어느 글이던 모든 진실을 모두 다 말할 수는 없다. 아니 다 말해서도 안된다.

아이러니는 객관적으로 쓰는 글이라고 믿는 대다수의 글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내 생각과 내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글이 어떻게 객관적 일수 있는가.
그러나 적당히 하겠다. 이전의 글들이 젊은 시절의 낭만적인 체험담을 피력하였다면 앞으로의 스토리들은 토마스하디와 찰스 디킨스 요소가 물씬 나는 자서전 에세이가 될 것이다.

이 에세이는 비극으로 시작해 아마도 비극으로 끝날 것 같다. 에세이 제목이 제프의 아메리칸 저니 아닌가. 그렇다면 찐한 아메리칸 스토리를 써야한다.

#왜 흑인 사회는 한인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안주나?
미국 어느 대도시, 한인상공 회의소, KAGRO, 그리고 지역 한인회에서 매년 흑인 장학생들을 선출해서 장학금을 지급한다.

한인 상인들이 흑인 강도들에게 처참히 죽어 나갈 무렵 그 어느 흑인 단체에서 한인 희생자 자녀들에게 단 한번이라도 장학금을 주었던가?
대도시들마다 그토록 수많은 한인들이 강도들의 총에 맞아 병원으로 그리고 영안실로 실려갔지만 24년 경찰생활에서 그리고 그후에도 단 한번 한인 강도가 흑인 상인을 죽였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장학금은 피해자 자녀가 받아야하는 것 아닌가? 흑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이유는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한인 단체들 역시 부유한 백인지역사회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전달하지 안았다. 이렇게 흑인지역사회에 관심있고 재투자하니 좀 봐달라는 제스처였다.
미국사회에서 흑인 역사가 한인보다 월등히 오래되었고 또한 비교도 안될 만큼 부유한 흑인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워싱턴 포스트 안보나?
그들은 왜 지역사회에 무관심인가? 왜 그 어느 흑인 지식인들과 부유한 흑인 사업가들이 뒤늦은 후발주자였던 한인들을 감싸고 이해하며 이 땅에 정착하는 것을 돕지 않았을까?
지금도 그 섭섭함이 내 가슴에 남아있다. 7080 시절 우리들 사정은 척박했고 시급했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전쟁터였다.

# 유대인들이 떠난 자리를 채웠던 한인 상인들
1980년 군에서 제대한 나는 NOVA 대학에 입학한 후 DC 빈민가 마켓에서 일했다.
그나마 위험수당 형식으로 급료가 버지니아보다 높았고, 학생 신분을 고려해주시는 한인주인분의 근무 시간 조절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현찰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당시 DC 그 어느 동네에서나 길모퉁이에 동네 마켓이 있었다. 작게는 1000에서 크게는 5000 Sq. Ft.까지 되는 마켓들은 거의 모두 한인 소유였다.
1960년대 흑인 폭동으로 일차 백인 탈출(white flight)이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의 반전시위 그리고 히피 문화로 인한 각종 문제로 유대인 상인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그 빈자리를 7-11과 High 등에서 경험을 쌓은 한인들이 채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유대인들의 비지니스 know how와 탄탄한 지역사회 기반이 없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백인으로 간주되는 유대인과 달리 흑인들 눈에 비친 한인들은 영어도 서투른 이민자에 유색인종에 그들보다 못한 소수민족으로 보였다는 사실이다.

#해 짧고 추운 겨울이 싫었던 이유
나의 첫 DC 직장은 North Capitol Street 선상에 있던 “Your Market”이었다. 전체 면적이 500 SQ Ft.도 안되는 비좁은 공간에서, 방탄 유리 저편에서 손님이 요구하는 물건들을 일일이 집어다 주며 방탄 유리 사이로 현찰을 주고 받는 참으로 고된 스타일 이었다.

손님이 단한발자국도 마켓 안으로 진입 불가한 가게에서 6개월정도 일했다. 어린 아이들은 늘 5전 10전이 모자랐고, 술에 취한 ‘와이노’들은 항상 개점 시간에 그리고 문 닫을 시간에 찾아와서 시비를 걸었다.
손님이 가게에 못 들어오니 근무 시에 강도 걱정은 없었지만 퇴근시간에 뒷문으로 어두운 골목길을 두리 번 거리며 주차되어있는 차에 까지 가는 그 몇 분의 시간은 불안의 극치였다.

마켓에서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해가 짧아진 추운 겨울날이면 두터운 자켓 입은 손님들은 모두 도둑 같아 보였고 총을 숨긴 강도 아닐까 걱정 되었다.
그 가게에는 유난히도 예쁘고 착한 흑인 여학생 하나가 자주 왔었고 큰 유리병에 들어있는 피클이나 버터 피칸 아이스크림을 사가곤 했었다.
불과 10년후 내가 마약계 형사신분으로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그녀는 양팔이 마약주사 바늘자국으로 퉁퉁 부어있는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 살벌했던 마켓에서 오직 하나 예쁜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 여학생...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잊지 못하는 주인 아줌마의 장조림 반찬
그곳의 일이 너무 고단해서 옮긴 곳이 국회의사당 근처 5번가에 있던 코너 마켓이었다.
주인 부부는 나이가 거의 50대였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외아들이 있었다. 작은 가게 뒤편으로 부엌이 있어서 삼시 세끼를 그곳에서 해결했고 영업이 끝나면 이층으로 올라가셔서 그곳에서 주무셨다.
그 작은 마켓과 이층 방들이 그들의 삶 전부였다. 주인 아주머니는 점심시간이면 부엌에서 따스한 밥한 그릇에 손수 만드신 장조림 반찬을 준비하시고는 “학생 점심 먹어 내가 카운터 볼게” 하셨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소기름 둥둥 터 있던 그 장조림 맛이 기억난다.
프런트 카운터 옆 벽면에는 동네 손님들의 외상 영수증들이 더덕이 붙어 있었다. 외상 영수증들 마다 이름, 별명 또는 누구누구 할머니 하는 식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 돈들 떼이면 어떻 하시려고요” 하고 묻자 반 대머리 주인 아저씨가 “학생, 장사 좀 손해도 보고 하는 거야” 하셨다.

# “X” 자 서명하던 흑인 할머니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어느 복더위 여름날 주위 사는 흑인 할머니가 오셔서 주인을 찾았다.
흑인들이 무엇을 부탁하려 할 때면 그 모습이 우리 한인들과 아주 흡사하다. 머뭇머뭇 거리며 눈치보고 안된다고 말해도 사정사정하며 매달린다.
할머니는 큰 손자가 감옥에서 출소해서 나왔는데 아쉽지 않은 저녁상을 차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벌써 깔려 있는 외상이 있어서 주인 아저씨가 거부했다.
주인 아저씨는 나름 외상 공식이 있었다. 어느 외상이던 한달이 넘어가면 안되고 한정 액수를 초과하면 안되는 식인데, 할머니이름으로 써있는 외상 영수증이 이미 벽에 너무 많이 붙어 있었다.
할머니가 마켓에서 죽치고 있는 동안 손님들이 오고 가며 할머니에게 인사했는데, 그녀의 가족사를 아는 눈치들이었다.
마켓을 못 떠나는 할머니가 안스러웠다. 결국 주인 아저씨가 바스켓을 쥐어주며 장을 보라고 하자 월초에 소셜 체크 나오면 제일 먼저 이곳으로 달려 오겠다고 몇 번이나 약속하며 fat back 과 collard green등을 담았다.
계산을 위해 외상 영수증에 사인을 하라고 펜을 내미니 “X”자만 서명했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였다.

#외상 영수증들을 넘겨 받고 홀로 문턱을 넘으셨던 할머니
월말이 지나고 월초도 지났는데 할머니 모습이 안보였다.
그렇게 약속 하고서는... 중순경이 되어서 나타난 할머니 손에는 소셜 체크가 아닌 마니 오더(money order)가 들려있었다.
큰 손자가 월초 할머니 앞으로 날라온 소셜 체크에 “X”자 사인하고는 어디에선가 몰래 벌써 써버린 것이었다. 어디서 돈을 만들어 오셨는지 “X” 서명한 마니 오더를 건네고는 한 뭉텅이 외상 영수증을 손에 받아 들고는 가게 문턱을 홀로 넘어 가셨다. 할머니 외상 영수증이 떠나간 빈 벽이 ‘훵’ 했다.
▷문의: jahn8118@gmail.com


제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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