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정](2) 간디스토마 걸리자 이민국서 추방명령 날벼락
남기고 싶은 이야기<제3화> 국군포로에서 아메리칸 드림까지 토마스 정
서던일리노이대에 안착하다
매년 장학금 받는 후배들 감사 편지에 큰 보람
매년 봄 학기가 시작될 쯤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메일박스를 살펴보는 게 습관처럼 돼있다. ‘오늘은 안 오려나?’ 이맘 때는 대학 후배들이 감사편지를 보내온다. 모두 ‘토마스 & 샤니 정 스칼라십’ 수혜자들이다. 편지를 읽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대학시절로 되돌아가는 듯 해 얼마나 흐뭇한지 모른다. 60여 년 전 친구들의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새삼 그 때가 그리워진다.
내 모교는 서던 일리노이 대학(SIU)이다. 일리노이주 남쪽에 소재한 카본데일에 캠퍼스가 있다. 1800년대 중반 세워진 유서깊은 대학이다.
20년 전 모교에 150만 달러의 장학금을 냈다. 재정상태가 썩 좋은 건 아니었지만 더 이상 미루다간 못할 것 같아 결단을 냈다. 수혜자는 연 20~30명 가량이다.
처음엔 장학금 지급대상자를 한국계로 특정할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접었다. 미국은 다인종 다민족 사회 아닌가. 문득 이 나라의 건국이념이 떠올랐다. ‘이 플루리버스 유넘(E pluribus unum).’ 우리말로 옮기면 ‘여럿이 모여 하나’라는 라틴말이다.
사실, 처음 적을 둔 미국 대학은 미줄라의 몬태나 주립대학이다. 모든 것이 서툴고 적응이 어려웠다. 특히 영어가 내 발목을 잡았다. 어느날 교수 한 분이 내게 짖궂은 농을 던졌다. “자넨 (미국) 여학생과 데이트를 해야겠네.” 미국여성과 사귀며 ‘브로큰 잉글리시’를 떨쳐내라는 비아냥이었던 것. 그래도 그 교수의 조크를 진정성 있는 충고로 받아들였다.
학기가 시작된지 얼마 안돼 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 처음엔 결핵이 의심됐으나 대학병원 측 정밀검사 결과 간디스토마로 판명이 났다. 그러나 이민국이 개입하면서 사태가 악화됐다. 전염병에 감염됐다며 추방명령을 내린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꿈이 날아갈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다행히 대학 측이 전염병이 아니라고 이민국을 설득해 추방을 면했다.
결국 한 학기를 통째로 날려버린 나는 ‘탈 몬태나’를 감행, LA로 진로를 바꿨다. 롱비치 대학에 새 둥지를 튼 것. 공부하랴 일하랴, 하루 24시간을 쪼개 썼지만 학비 대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내게도 ‘기적’이란 게 찾아왔다. 서던 일리노이 대학에서 전액 장학금 제의가 온 것이다. 곧바로 짐을 싸고는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올랐다. 도중 라스베이거스에서 휴식이 주어졌다. 처음으로 슬롯머신이란 걸 해봤다. 동전 몇 개를 넣었는데 갑자기 불이 번쩍번쩍하며 난리가 났다. 기계를 망가트렸으니 겁이 날 수밖에. 가난한 유학생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딱 하나. 줄행랑을 쳤다. 잭팟이 터진줄도 모르고.
서던 일리노이 대학은 내게 또 하나의 선물을 안겼다. 한달 생활비조로 200 달러를 준 것. 세금을 제하고 191 달러를 손에 쥐었다. 모처럼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대학엔 한국 유학생이 20여 명 있었다. 모두 내로라하는 고관대작의 자제들이었다. 이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군 미필. 나만 군대를 갔다왔으니 그들 세계에선 내가 딴나라 사람으로 보였을 게다.
돈도 빽도 없는 내가 유학의 기회를 잡은 건 오로지 전쟁 덕분이었다. 상이군인들에겐 특혜가 주어졌다. 목숨과 미국을 맞바꿨다고 할까.
이들 가운데 지금까지 교유하고 있는 평생의 벗이 있다. 정치학을 전공한 신황식 군은 교수가 돼 모교에서 정년퇴직했다. 당시 그는 ‘마사코’라는 일본여성과 사귀고 있었는데 우리는 주말이면 30여 마일 떨어진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로 가 장을 봤다. 일본 마켓이 있어 필요한 식품을 샀다.
마사코와의 사랑이 깊어지자 신 군은 내게 고민을 털어놨다. 부모님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 내가 해결책을 내놨다. ‘귀국하려면 마사코와 헤어지고 미국서 살려면 결혼하라.’ 그러면서 협박성 충고도 날렸다. ‘앞으로 마사코와 같은 여자는 절대 못 만날거다.’ 내 ‘협박’이 맞아 떨어졌는지 그는 마사코를 평생의 반려자로 맞았다. 2년 전 내 생일에는 부부가 멀리 필라델피아에서 비행기를 타고와 축하를 해줬다.
당시 대학에는 중국 학생들이 꽤 많았다. 이들은 큰 집을 빌려 한 집에서 살며 생활비를 아꼈다. 단합이 아주 잘됐다. 얼마나 부러웠던지.
인도와 베트남 출신 학생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분열과 반목이 일상이었다. 그때 느낀 게 있다. 식민지 출신은 단결이 어렵다는 것. 종주국이 식민지 백성을 분열 통치(divide and rule)해 이같은 성격이 고착화되지 않았나 싶다.
서던 일리노이는 솔직히 내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처음엔 내게 ‘배움’의 기회를 줬지만 나중엔 ‘명예’를 씌어줬다.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과학대학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명예박사학위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뜻밖의 소식이었다. 그런데 요구사항이 많았을 뿐더러 절차 또한 매우 까다로웠다. 보통 3~4년 걸리는데 나는 1년만에 심사가 끝냈다. ‘내가 박사 가운을 입다니…’ 감개무량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당초 나는 UCLA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논문을 쓸 즈음 갑자기 눈이 나빠졌다. 대학병원 검사결과는 내게 깊은 좌절감을 안겼다. ‘책을 절대 가까이 하지 말라.’ 담당의사가 내린 극단적인 처방이었다. 자칫 실명할 수도 있다면서다. 내 꿈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결국 UCLA 박사를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내 모교에서 명예박사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이제야 꿈을 이룬 것 같아 기뻤지만 한편으론 아내(샤니 정)를 볼 면목이 없었다. 살림하랴, 비즈니스 챙기랴 1인2역의 삶을 사느라 자신의 대학원 꿈을 포기했으니 말이다. 그해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20여 명이나 됐지만 명예학위는 나 혼자였다. 대학원장은 축사의 절반을 나를 소개하는데 할애해 정말이지 몸둘 바를 몰랐다. 그것도 맨 처음으로. 학위 수여식에는 고맙게도 벤자민 홍 행장이 동행해 줬다. 그날의 소회를 홍 행장이 중앙일보에 기고했다. 간추리면 이렇다.
“명예박사는 학술적 기여, 사회공헌 등 한 개인의 총체적 역량을 두루 감안해 수여하는 학위다. 이민 백주년을 맞는 우리에게 뜻 깊은 선물이다. 오늘 만큼 내가 한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박용필 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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