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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우리 동네 책방

“신간이 입구에 진열되어 있고
몇 년이나 그 자리에 있었을
책들도 지난 세월의 먼지를 안고
가지런하게 꽂혀 있었다”

집에서 나와 언덕을 내려가다 보면 사거리에 거의 다다를 즈음에 한국 책방이 하나 있다. 이곳은 세련된 이름의 서점이라기보다는 어쩐지 책방이라고 불러야 더 잘 어울릴 듯한 모습이다. 빛바랜 간판이 흐릿해서 그 앞을 몇 해나 지나다녔으나 그곳이 책방인 것을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유심히 보니 언제나 문이 열려 있는 것이다. 별로 드나드는 사람도 없어 보이는데 일요일에도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책을 고르는 손님은 없고 서점 주인만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책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갓 출간된 신간이 입구에 진열되어 있고 몇 년이나 그 자리에 있었을 법한 책들도 먼지를 안고 가지런히 꽂혀 있다. 눈에 익숙한 이름의 책들도 있고 모르는 젊은 작가의 책도 있다.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작가의 글을 펼쳐보며 새로운 세계를 엿보기도 한다.

삶은 예습할 수 없음으로, 또 복습하여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다른 이의 삶을 복기하듯이 읽는다. 내가 살아온 삶이 그들의 그것과 얼마나 다르고 또 비슷한지 조심스레 가늠해 본다. 시공간을 넘어 누군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에는 내가 가는 길이 크게 잘못되지 않은 것 같은 안도감과 함께 동반자를 만난 듯 의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설사 다르다 하여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낯선 것이나 이상한 것, 나에게 일상적이지 않은 것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이제 좋았던 것은 내 몸처럼 더 익숙하게 되고 서툴렀던 것을 배우기란 더 어렵게 되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 책을 뒤적였으나 이번에도 결국 익숙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한 권을 사서 나왔다.



소설은 자주 미래보다는 지나온 과거를 생각나게 한다. 댓돌 위에 앉아 지난한 세월을 회상하는 노인처럼 어느 구절에 생의 한 점 속으로 속절없이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사나 명사로 설명되기보다 형용사와 부사로 조금은 감상적으로 기억된다.

고등학교 때에는 종로서적에 자주 소설책을 보러 다녔다. 종로 2가 버스 정류장 앞에 있던 몇 층 건물이 전부 서점이었는데 친구 만날 약속은 주로 그곳에서 하였다. 그 당시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입구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약속으로 서성이고 있다. 나는 2층 인문 서적 앞이나 신간 서적이 쌓여있는 곳에서 만날 약속을 정하고 한 시간쯤 일찍 서점에 도착한다. 한동안 보고 싶었던 책을 보고 있으면 시간 맞춰 약속 장소에 가야 하는 조급함도 없고 친구가 조금 늦어도 개의치 않게 된다. 인터넷 거래에 밀리어 종로 서적이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던 날은 어쩐지 오래된 친구를 잃은 느낌이었다.

대학교 다닐 때는 광화문에서 버스를 갈아타게 되면 교보문고에 들른다. 한쪽에는 커피숍도 있었는데 우리 친구들은 책을 사는 것과 상관없이 자연스레 그곳에 모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몇몇 친구들만 모여 책을 읽고 커피도 마시고 하였는데 나중에는 책 읽는 독서 모임으로 발전하였다. 나는 그 시절을 생각할 때 가장 많은 형용사와 부사가 필요하다.

수년 전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교보문고에 가 보았다. 밖에는 주말마다 촛불집회가 열리고 시국이 어수선한 즈음이었는데 서점 안은 세월을 비켜 서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조금은 안타깝고 조금은 화가 났고 조금은 서글펐지만, 서점이 여전히 평안한 것에 대하여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요즈음은 책에 밑줄을 그으며 읽는다. 기억할 만한 명언이라든가 삶의 지표가 될 만한 좌우명이라든가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밑줄을 긋는다. 한국에서 독일로 여행 가서 독일어를 쓰는 팔레스타인 남자를 만나 영어로 말하는 사람 이야기, 소심한 사람이 가진 보이지 않는 힘에 관한 이야기, 예기치 않은 상황을 글쓰기 위한 선물로 받아들이게 된 시인 이야기, 너무나 공감 능력이 뛰어나서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자신이 불행한 사람 이야기, 마당 있는 집을 갖고 싶은 젊은이가 화분에 물을 주며 월세 집을 전전하는 이야기, 사람과의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를 한 발짝 물러나 관찰한다. 그리고 나만의 흔적을 남기고 표시하고 기억한다. 때로는 소설보다 더 구차하고 위험하고 극적이기도 하지만, 최소한 상투적이거나 뻔한 결말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들은 삶의 이야기를 과장 없이 성실하게 말한다. 그저 하루하루를 촘촘히 반복되게, 때로는 여유롭고 느슨하게 살아낼 뿐이다. 아껴가며 한 자 한 자 마음으로 읽는다. 그러면 그들의 삶이 내게로 온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속이 시끄럽고, 눈물 나고, 기뻐하고, 다투고, 화해한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한 줄의 글로만 남았을 때도 그 행간의 사람 사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공백에 나만의 언어로 채울 수도 있다. 이것은 스스로 책장을 넘기는 수고로움에 대한 보답이다.

책 읽는 즐거움이 점점 퇴색해가고 활자가 사라지고 있다. 세월을 쫓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우리 동네 한국 책방도, 동네 한가운데 크게 자리 잡은 미국 서점도 쇠락해 간다. 지금의 그 책방도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애잔한 마음에 자꾸 돌아보게 된다.


박연실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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