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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의 아메리칸 저니 #6]왜, 말 못했을까? 더 모진 고난도 내가 막아주겠노라고...

# 반지 없는 손가락
따스하고 짙은 커피향이 떠오르다 차디찬 병원 실내온도에 짓눌려 내려앉았다.
내 손에 있는 반지와 대조적으로 그녀의 손가락에는 반지가 없었다. 그동안의 의사 공부 그리고 이어진 고된 직장생활에 아직 좋은 사람을 못 만났나 하는 허무한 생각이 잠시 머물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나는 그녀의 여동생 안부를 물어 보았다. 그녀는 안면에 미소를 지으며 “She is doing fine, you know Jeff, she had a crush on you!(잘 있지, 제프 너 알지, 내 여동생이 너 좋아했다는 거)”
나는 멋쩍어 웃었고 그녀는 내 그런 모습에 미소 지었지만 그때 그 미소는 슬펐다. 그녀가 내 여동생의 안부를 물었다.
요즘 여동생과 연락도 없이 산다고 말하자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어머니는 미국에 들어 오셨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이제 온 식구가 다시 미국에 모였으니 열심히 잘 살 거라며 응원해주었다.

#경찰관과 여의사


내가 경찰관으로 근무한다고 하며 허리에 차고 있는 총을 슬쩍 보여주니 눈을 크게 뜨면서 요즘 응급실이 총상 입은 환자들로 넘쳐난다며 조심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당시 DC는 ‘마약과의 전쟁’으로 매년 500여 명이 총에 맞아 길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학업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잘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가족들 부양하려 정신이 없던 시절이라 포기했다는 말을 못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님의 병이 심각하니 준비를 잘 해야하고 최고의 의료진과 시설이 있는 이 병원에서 잘 싸워보라며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심적으로 그녀가 부담스러울 것이니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다른 좋은 의사를 소개하겠다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말문이 막혔다. 그녀 아버님의 과묵했던 표정, 그녀 어머니가 준비해주었던 따스한 음식을 둘러 앉아 손으로 먹던 기억들이 주마등 마냥 눈앞에 흘러 같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에게 또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병원 앞 워싱턴 서클을 돌았다. 그런데 왠 일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서클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몇 번이나 돌고 있었다.

#잔디밭에 누운 재스민
아버님의 암 투병은 3년에 걸친 서사시 와도 같은 치혈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병에 장사 없다고 강하시던 아버님은 한여름 마른 장작 마냥 비참할 정도로 몸이 빠지신 다음 내 품 안에서 돌아가셨다.
조용한 장례식을 치르고 몇 년이 지난 1995년 나는 경찰국에서 경감으로 진급하여 모토 사이클 부대 지휘관이 되어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행사도 사고도 많아서 경찰국 오토바이 부대가 늘 바빴다. 그런 바쁜 일정 중에도 잠시 숨돌릴 여유가 생기면 근무시간에 나는 홀로 경찰 모토 사이클을 몰고 헤인스 포인트(Haines Point)로 갔다.
DC에서 탁 트인 물가는 그곳이 유일했다. 어느 봄날 조용히 모터 사이클을 타고 지나가는데 강가 공원 잔디밭에 누워서 포토맥 강물을 바라 보는 그녀의 모습이 잡혔다. 재스민 옆에는 작은 피크닉 바스켓과 와인병이 있고 한 건장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증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벗꽃잎들이 볼티모어에서 그녀와 둘이서 맞았던 빗줄기 마냥 봄바람에 하늘을 뒤덮고 바퀴 아래로 낙하했다.
“재스민” 그 이름을 홀로 입안에서 불렀다. 그녀가 잔디밭에 누어있는 자태가 한 폭의 프랑스 페인팅 같았다.
그러나 Lara을 향한 Dr. Zhivago의 부름이 차마 입 밖으로 못 나왔듯 재스민의 이름도 내 입안에서 공허이 맴돌았다. 당시 ‘Awakening’ 동상이 있던 모퉁이를 돌아 공원을 나오며 잠시 나마 그녀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본 것을 행운으로 여기며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었다.
순간, 오른손으로 모토 사이클 가스를 끝까지 돌렸다. 백 파이프는 차마 다 연소되지 못한 시커먼 연기를 구토하듯 배출했다.
앞 바퀴가 크게 흔들렸다. 턱 밑에 붙어있던 헬멧 보호 줄을 풀고 마음껏 강바람에 취해보았다. 그렇게 그녀에게 취했던 그 달콤한 나날들이 점점 뒤편으로 멀어져 감이 가슴아팠기에 나는 모토 사이클을 타고 이곳 저곳 헤맸다. 그 사쿠라 꽃잎 휘날리던 날이 내가 마지막 본 재스민의 모습이었다.

#‘Unforgiven’
왜 말 못했을까? 아버지의 빗자루 구타가 있고 난 후 그보다 더 큰 아픔, 더 모진 고난도 내가 막아주겠 노라고... 왜 말 못했을까?
잘난 척하며 용기 있는 척 하며 살아왔지만 부끄럽기 그지 없는 삶이었다. 내게 그때 그 순간이 또 다시 찾아 온다면... 이제는 용기 내서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차라리 다 성장한 내 딸아이들에게 인종과 문화에 관계 없이 너희들이 선택한 배우자 그 누구라도 행복하게만 살아 달라고 말하고 싶다.
재스민이 내게 남기고 간 그 소중한 웃음들과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들은 무슨 의미일까? 그녀에게 고백해 말하고 싶다.
용기가 없었노라고. 얼마전 크린트 이스트웃드가 감독 주연한 ‘Unforgiven’ 을 다시 보았다. 인간의 탈을 쓰고 청부 살인 업자로 전락한 남자는 두 어린 자식들마저 버리고 또다시 살인에 가담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자기 나름 정의를 실천한다.

#부활
매일 잠들며 죽는 인간은 다음날 부활한다. 그러나 새롭고 발전된 인간으로 부활하여야만 의미가 있다.
인간의 삶에 깨달음, 속죄(atonement), 그리고 구원(redemption)이 없다면 무슨 의미일까 싶다. 나는 종교가 없으나 예수의 위대함이란 우리에게 부활(resurrection)의 기적을 알려주었다는데 있다.
내가 이해하는 부활이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매일 잠들며 죽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다시 부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똑같은 인간으로 부할하는 것이 무슨 의미 있겠는가? 매일 새로운 삶, 발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놀라운 기적을 우리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그분의 가르침이라 생각된다.
아버님은 처음 본 그녀가 무엇이 그리도 미워서 빗자루를 휘둘렀을까? 그녀에 대한 편견 그리고 자식에 대한 편파적 사랑 탓이었다.
Unforgivable(용서 못할) 사람은 없고 그런 상황만 존재한다. 그녀에게 ‘나, 제프’ 이제 괜찮은 놈으로 살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때 그 상황을 용서받고 싶다.

#Epilogue
그녀와 만났던 1980년에서 정확히 4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알링턴에 소재한 유서 깊은 단독주택을 구입했다.
집 바로 옆이 알링턴 역사 박물관이고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하기에 나도 이사로 가입했다. 박물관에서는 매년 워싱턴 칸트리 클럽(Washington CC)에서 후원금 마련 볼룸댄스 파티가 있고 두터운 주머니를 풀어 주어야하는 자리였다.
한 젊은 인디언 청년이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마음 훈훈한 연설을 했다. 이 자리에서 한 지인이 알링턴 역사책이라면서 한권을 내게 선물했다. 와인 잔이 오고 가는 사이에 무료하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는데...

#이민자들의 역사 그리고… Serendipity
내 눈이 의심 되는 사진이 책에 있었다. 재스민 식구 모두가 큰 픽업 트럭에 올라타서 찍은 한장의 사진이 알링턴의 ‘역사책’에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정겨운 식구들의 모습이 빗 바랜 사진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사셨던 아버님이 떠올랐고, 동창 과의 주먹다짐이 있었던 Mr. Smith식당, 친구 찾아 달려갔던 Buffalo 여행길이 떠올랐다.
빗속을 둘이서 뛰었던 볼티모어에서의 추억, 병실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녀, 돌고 돌았던 워싱턴 서클, 벚꽃 날리던 포토맥강 길, 그리고 병실에서의 운명적 만남 그 모든 추억들이 마치 사진첩 돌리듯 한장 한장 내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와인에 취기가 오른 나를 와이프가 테스라에 실어주었다. 차는 지나온 세월을 말해주듯 소리없이 고엽들이 휘날리는 길을 달리고 그 위로 밤비가 내렸다. 차 창문을 살짝 여니 어느덧 늦가을이었다.
▷문의: jahn8118@gmail.com


제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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