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In] 거꾸로 걸린 성조기
국기는 거꾸로 섰다.지난달 베터런스데이 즈음이다. 한 식당에 걸린 성조기는 위 아래가 뒤집혀있었다. 식당 주인은 필리핀계다. 큰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알려줬다. 식당 주인은 일부러 그렇게 걸었다고 했다. 이미 여러 차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한 듯 답변은 각본 같았다. “나라가 위기다. 대선이 끝난 지 1주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당선인이 2명이다. 서로 대통령이라고 한다. 모두에게 정신차리라 경고하고 싶었다.”
성조기를 거꾸로 걸면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는 뜻이란다. SOS 신호다. 미국이 조난상태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거꾸로 걸린 성조기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였다. 목숨 바쳐 지킨 국가의 가치가 뒤집혔다고 했다. 전쟁터에서 코끝 찡하게 해준 국기가 지난 4년간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됐다고 개탄스러워했다.
그가 말하고 싶어했던 특정 집단은 MAGA다. ‘Make Great America Again’의 약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이다. 유세현장에서 성조기는 MAGA가 적힌 빨간모자와 한 세트를 이뤘다. 때론 극우단체들과도 어울렸다. 출퇴근길 도로 위에선 부자연스럽게 크게 만들어진 성조기 스티커가 붙은 차들이 늘어났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이 반복됐고 어느 틈엔가 성조기는 대통령 지지자들의 표식으로 굳어졌다.
‘서로 다른 애국’이라 받아들이는 쪽도 있었다. 미국 역사에서 성조기가 정치적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 때 성조기는 참전 반대의 표식이었다. 1984년 대선 당시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반대한 그레고리 존슨이 성조기를 불태우면서 헌법 개정 움직임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다른 애국들이 서로 총질까지 해대는 국가적 분열을 낳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징조는 대통령의 유세현장에서 발견됐다. 성조기 옆에 걸렸던 또 다른 깃발은 국기가 대통령의 깃발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깃발엔 ‘Don’t tread on Trump'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 '트럼프를 밟지 말라'는 뜻이다. 성조기를 밟으면 국가 모독인 것처럼 트럼프를 반대하면 애국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MAGA가 성조기를 흔드는 바람이 거셀수록 그 반대쪽에 선 사람들은 점점 성조기에서 멀어졌다. 트럼프 지지자로 오해받기 싫어서다. 일부 극진보주의자들은 트럼프 정권 아래에서는 성조기와 나치 깃발, 인종차별을 상징하는 남부연합기가 같은 뜻이라고까지 폄훼하기도 했다.
사회학자들은 성조기의 의미가 트럼프 정권을 기준으로 바뀌었다고 평가한다. UC샌디에이고의 존 에번스 사회학 교수는 “성조기가 정반대 의미로 해석되는 시대”라면서 “종전의 포용적 민주주의(inclusive democracy)의 상징과 현재의 배타적인 국수주의(exclusive nationalism)”라고 했다. '우리'로 묶어주던 깃발이 '그들'로 나누는 데 쓰이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치적 신념과 상관없이 성조기에는 변하지 말아야 할 의미가 있다. 성조기는 한문으로 별 성(星), 가지 조(條), 깃발 기(旗)를 쓴다. 영어로는 'Stars and Stripes'이다. 별 50개와 줄 13개를 뜻한다. 현재의 50개 주와 독립선언 당시 식민지였던 13개 주다. 주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과 이해관계를 연방이라는 틀에 담은 것이 성조기다. 27번 모양이 바뀌긴 했지만 200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하나된 미국을 뜻했다. 특정 개인이 반드시 이끌어야만 하는 미국이 아니다.
대선 한달이 지났다. 이제 곧 새로운 4년이 시작된다. 조 바이든 당선인의 일부 지지자들은 대선 승리로 성조기가 본래 의미를 찾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들 역시 MAGA를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다.
식당 앞 국기는 아직도 거꾸로다.
정구현 선임기자·부장 chung.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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