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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안의 아메리칸 저니 #1

살다 보니 이길 저길 많이도 헤집고 다녔다.
군자는 대로 행이라 했거늘 큰길 뿐만 아니라 오솔길 그리고 후미진 뒷길까지 온갖 길 위에 서서 때로는 가야할 길을 잃고 미로의 세계에서 헤매기도 했다. 출발점이 제각각 다른 우리 인생 과연 종착지는 어디일까?
인생 일로가 아니었던 나의 인생길 이야기를 하겠다.

# “너 미국 왜 왔니?”
이민자란 명패을 달며 미국서 산지 벌써 반세기. 영주권자에서 시민권자, 학생에서 군인과 경찰관 그리고 사업가로의 변신을 거듭하며 살았다.
총각에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신분과 삶의 전반적인 모습이 변했지만 내가 왜 이 땅에 왔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적이 별로 없다. 나에게 지난 20년은 세탁업이 주업이었다.
우리 테일러(Tailor) 아낙들의 손 끝은 바늘과 가위로 인해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면, 세탁소 아저씨들의 손과 팔뚝은 불같은 스팀파이프에 입은 화상자국 투성이였다.



그러한 피와 땀은 그 누구 그 무엇을 위한 헌신 이었을까?
오또 비스마르크 (Otto Vismark)는 피와 땀 이외에는 프로션(Prussian) 제국에 바칠 것이 없다고 했다. 우리 일반인들은 고귀한 제국의 재상도 아니건만 어떻게 애국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만 했는지 본능적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이민자 이기에 경험했던 애잔한 이야기들, 그래서 피와 땀과 눈물이 범벅이었던 날들을 회상하며 그 인생에서 걸었던 여정을 토대삼아 보다 빛나는 미래를 기원하며 이글을 기고한다.

# Silver Hill Road (Suitland High School)
고1 영어반(ESL)에서 만났던 일본 여학생은 키가 작고 깜찍했다.
그녀는 내가 얼마전 조지타운 대학원에서 만났던 또 다른 일본 유학생 이전까지는 유일한 같은반 일본 학생이었다. 그녀가 내게 물어본 첫 마디가 “너, 왜 미국 왔니? (why did you come to America?)”였다.
그 질문이 왜 지금까지 기억되는 것일까? 그리고 대답이 그 때나 지금이나 그리 수월치 않다. 나는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서 미국에 오게되었다.
가발 공장을 하시던 아버님은 미국 회사들과 직거래 하겠다는 목적으로 홀로 미국행을 택하셨다. 그리고 몇 년 후, 우여곡절 끝에 사춘기 우리 삼형제는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나는 TWA(Trans World Airline) 비행기에 탑승하고서야 한국을 떠난다는 것을 실감했다.

당시 공항에서의 이별을 주제로 하는 유행가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공항이란 그리고 해외 이민이란 떠나서 돌아 오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대구에서 큰집 식구들이 그리고 상주, 김천에는 외가댁, 대전 그리고 강릉에서도 친지들이 마중 나왔다. 어린아이들 미국 떠나는데 전국에서 모여든 기이한 현상이 그 때는 무척 정상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만 한국에 홀로 남으시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해 결국 내 인생도 바뀌게 되었다. 결국 삶이란 수많은 점들의 연결선이다.
나의 이민 결정은 전적으로 부모님의 의사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그후의 내 삶의 상당 부분이 그때 그 분들의 결정 때문에 내가 취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많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보니 “너, 미국에 왜 왔니?” 에서 “너, 아직 미국에서 왜 사니?” 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 너, 미국에 왜 사니?
세상이 천지개벽되어 미국은 온갖 문제점을 안고 사는 나라로 한국은 급속하게 발전돼 선진국으로 입문한 상황에서 어느 한국 분에게서 들은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여러가지 미국 특유의 문제점들을 감안하더라도 역시 미국이 다문화 사회여서 소수 이민자에게 편하고 열심히 일하면 미국 꿈을 성취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그 꿈을 실현했다. 그러나, 지금은 글로벌시대 미국에서 어느 정도만 기반을 잡은 사람이라면 굳이 미국에서 계속 살아갈 이유가 없다.
그래서인지 많은 미국 은퇴자들은 생활 경비가 적지만 윤택한 노후생활을 즐기기 위해 멕시코, 중남미 또는 유럽으로 이주하기도 한다. 많은 젊은이들도 여행과 새로운 경험을 위해 해외 직장을 선호하는 추세다.
나 역시 코로나 사태만 거치고나면 고국으로 돌아가서 한동안 살고 싶은 생각이다. 그 이유는 모든 다른 한국 분들과 유사하다. 우선 언어와 문화에 어려움이 없고 그동안 발전한 한국의 모습에 감탄도 해보고 싶고 옛추억에 취해보고도 싶다.
그러나 한국에서 영원히 은퇴해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 역시 멕시코, 유럽, 미 서부지역 그리고 뉴욕에서도 살아보고 싶다.
궁극적으로 어디에 서도 살수 있다는 얘기는 일단 영어권(세계가 영어권이란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어야하고 경제적 뒷받침이 되어야한다. 물론, 정도의 차이에 따라 논란의 여지는 있다.

# 첫 미국인(First American) 이란 의미
나의 고국은 한국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군 복무하고, 직장생활했으며 처자식과 살아왔다. 더더욱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시민권 선서는 미국 이외의 그 어느 국가에도 충성 불가하다는 서약이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역시 시민권을 얻는다는 것은 미국에 대한 확고한 충성보다 그에 따른 혜택이 목적이었다.
우리 아버님은 격렬한 미국팬이었다. 미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조지워싱턴, 에이레햄 링컨 사진을 방에 걸어 놓고 사셨다.
지금은 사라진 First American Bank에 은행구좌를 가지고 계셨는데, 그 은행 이름이 좋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영주권 신분으로 돌아가셨다. 우리 집안에서의 첫 미국 시민권자는 미군에 복무하고 있던 나였다.
시민권을 획득하고 나서도 수많은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을 받으며 그들과 싸운 기억이 많다. 그때마다 미국에서 출생한 미국인보다 이민자로서 시민권을 자의로 획득한 이들이 훨씬 더 애국자들이라고 항변하곤 했다.

# 선택의 중요성
전자는 출생으로 자동적으로 얻은 특권이라면 후자는 여러 어려움을 넘어 자의로 얻은 점이 확실히 다르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타의에 의한 그러나 후자는 자의에 의한 미국 시민권자라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미국의 국부 조지워싱턴을 시작으로, 그 후 7명의 미국 대통령이 영국시민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1837년 마틴 벤 뷰런이 8대 대통령으로 취임해서야, 미국 태생 대통령이 탄생했다. 이민자로서 시민권을 획득한 모든 분들은 워싱턴과 같이 목적 의식이 뚜렷한 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한국출신 미국 시민권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나의 개인적인 스토리를 토대로 여러 직장과 사업을 소개하며 그들의 성공담, 그리고 희비가 엇갈렸던 미국에서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
▷문의: jahn81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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