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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켈리 캠프의 산행

“이 순간만큼은
그랜드캐년의 절경도
부럽지 않은 행복이
갈증 난 몸과 영혼에
흘러 들어간다.”

노동절 연휴, 2박 3일 동안 애리조나에 있는 그랜드캐년을 다녀왔다. 사우스 카이밥에서 시작해 팬덤 랜치가 있는 콜로라도 강까지 내려가 브라이트 앤젤로 올라오는 18마일의 혹독한 산행이었다. 1년에 5만5000명 정도가 그랜드캐년을 여행하며 그중 1%만이 협곡 바닥까지 내려간다. 그것을 얻기 위한 대가도 만만치 않지만 그랜드캐년의 웅장함을 허리에 끼고 능선을 따라 걷는 아름다운 코스이기에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오직 보고자 하는 자에게 주어진 캐년의 위대한 속살을 눈에 넣고 돌아온 후풍인가. 산이 그리워 토요 산행에 나온 멤버가 고작 여섯 명.

아침 8시에 시작한 산행이다. 단체 사진 찍을 1마일 지점에 치타님이 보이질 않는다. 온타리오 픽 정상 찍고 켈리 캠프에서 함께 점심을 먹자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치타처럼 날렵하게 사라졌다. 30대부터 풀 마라톤으로 단련된 몸이라 동물 측에도 낄 수 없는 비둘기, 민들레, 릴리, 이슬의 애칭을 가진 우리와 함께 산행한다는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미풍도 불지 않는 3마일 구간까지 힘들게 걸어 올라갔다. “바람아 불어라 길을 떠나자, 어차피 머물 곳은 없지 않더냐. 바람아 불어라 어서 떠나자, 저 구름이 흘러가는 곳으로…” 가수 박현의 ‘바람아 불어라’ 노래 가사가 생각날 만큼 바람이 그리운 날이다. 머리 위 구름은 흘러가는데, 머리카락 한 토랑 흔들리지 않게 꼭꼭 숨어있는 바람을 찾아내 빨리 떠나자고 앙탈이라도 부리고 싶다. 머리부터 흘러내리는 땀으로 온몸이 샤워한 것 같다. 여자 땀 냄새에 반해 질기도록 떨어지지 않는 하루살이와의 반나절 동행, 헤어지자고 통보한 남자에게 지속해서 구애받는 심정이랄까. 끈적거림에 불쾌해진 마음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올라 더위에 지친 마음에 무게를 더한다.

2시간 만에 도착한 새들(Saddle). 한여름에도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새들에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치타님과 점심 먹기로 약속한 켈리 캠프까지 0.9마일이 남아있다. 다리가 무겁다. 모래 주머니를 차고 걷는 느낌이다. 뜨거운 햇볕이 모자를 뚫고 들어온다. 우리의 몸은 숨을 길게 쉴 때마다 흰 수증기를 뿜어내는 열 받은 증기 기관차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갑자기 목이 뻣뻣해 온다. 켈리 캠프에 도착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백팩을 벗어 바닥에 패대기쳤다. 더위와 백팩 무게에서 벗어난 몸은 쉼을 달라 요동친다.



등산화를 벗고 나무에 기대어 길게 누웠다. 높고 파란 하늘과 코를 간들거리며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는다. 볼 수도 없는 작은 세포까지 만족한 휴식에 들어간다. 이런 것이 산행의 묘미, 삶의 에너지 근원이 아닌가.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이룬 뒤에 갖는 달콤한 휴식은 나에게 주는 포상이다. 선물 받는 느낌이다.

켈리 캠프에서 정상까지 왕복 3마일. 치타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이상이다. 우리의 몸과 정신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기에 그분을 기다리지 않고 하산하기로 했다. 세 명이 마실 물은 겨우 한 병. 약수터에서 물 채울 생각을 하며 내려왔지만, 더위 먹은 머리가 오버 히트된 상태라 그곳을 지나치고 말았다. 뇌는 전보를 친다. ‘물 없음.’ 서로 수분을 뺏기 위한 전쟁을 한다. 온몸이 타들어 간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며 심한 갈증을 느낄 때 급히 내려오는 치타 님을 만났다. 우리는 한소리로 외쳤다. “물 있어요?”

그가 내민 물을 우리는 허겁지겁 마셨다. 순식간에 빈 통이 되자 치타님이 개울가로 내려가 물을 채워주셨다. 워키토키로 연락이 닿지 않아 정상 찍고, 점심도 먹지 않고 부지런히 내려오는 중이라고 했다. 배터리 충전도 되지 않은 워키토키를 들고 온 나의 실수로 인해 배를 쫄쫄 굶고 내려오는 그분께 미안하고 죄송했다. 주차장에 설치된 테이블에서 치타님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점심과 약수로 채워진 나머지 물 한 병을 나누어 마시며 두 명의 멤버를 기다렸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산행의 고단함과 하루살이와의 동행이 얼마나 지겹고 싫은지. 서로를 위로하며 대화하는 동안 레오파드와 민들레가 도착했다. 물 한 병 있어요? 그들도 목이 타나 보다. 차로 뛰어가 꺼내온 더위 먹은 물병을 건네준다. 온종일 차 안의 열기에 통통해진 페트병을 보며 온도에 따라 행복도 사랑도 부풀어 오른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물 한 병의 기적이라면 지나친 표현인가. 이 순간만큼은 그랜드캐년의 절경도 부럽지 않은 사랑과 행복의 호르몬 옥시토신이 서로의 연결고리가 되어 갈증 난 몸과 영혼에 흘러 들어간다.


김자넷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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