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수] 총들고 지킨 한인타운…검사들은 '불법' 낙인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민병수 변호사
<11> 끝없는 차별, 또 다른 폭동
배심원 뽑으면 대부분 흑인
친분있는 흑인 변호사 도움
계획 범죄 입증 억울함 풀려
민병수 변호사가 커뮤니티 봉사 활동을 시작한 건 어릴 때부터 읽은 독서가 힘이 됐다.
민 변호사는 “책을 읽으면서 세상에 불공평한 게 너무 많고 약자들이 많이 당한다고 생각했다”며 “혼자 사는 세상도 아닌데 나만 잘 살면 그게 행복할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1990년대를 떠올리는 민병수 변호사의 기억은 한 마디로 ‘아픔’이다. 떨리는 목소리는 LA 폭동 때 폭도로 몰려 억울하게 체포된 한인들에 대한 기억을 회고할 때마다 표정은 강렬해졌다. 법도 외면했던 한인 피해자들의 억울한 케이스가 법정에 넘쳤던 것이다.
LA폭동이 발생하기 전 1991년 3월 16일 사우스 LA지역에서 두순자 사건이 발생하자 한흑 갈등을 부추기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한인들은 돈만”차별적 기사
당시 한인들은 사우스 LA 지역에서 리커스토어를 많이 운영했고 흑인 갱단들은 한인 업소들을 노려 물건이나 돈을 훔쳤다. 강도를 당해 사망한 한인 업주들도 꽤 많았다. 하지만 주류 언론들은 한인 이민자들이 흑인 커뮤니티에 들어와 돈만 벌어간다는 차별적인 기사를 쓰고 갈등을 부추겼다. 한인 업주들이 받는 피해는 입을 다물었다.
그 때 민병수 변호사가 두 씨 사건과 비슷한 케이스를 의뢰받는다. 잉글우드 지역에서 리커스토어를 운영하는 한인 업주였다. 흑인 여자 고등학생이 물건을 훔치고 자전거를 타고 달아나 차를 타고 두 블록이나 쫓아가 잡고 폭행한 케이스였다. 여학생은 경찰에 신고했고, 업주는 오히려 폭행 혐의로 체포됐다.
“사건 얘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잉글우드와 캄튼 지역 법원은 배심원을 뽑으면 거의 전원이 흑인이다. 두순자 사건으로 흑인 커뮤니티와 언론 모두 예민해져 있는 상태인데 이 사건이 배심원 재판으로 넘어간다면 분명 한인 업주가 불리할 것 같았다.”
민 변호사는 고민하다 형사법 관련 콘퍼런스를 다닐 때 알게된 칼 존스 변호사를 찾아가 케이스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검사들 사이에서 실력이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한인 변호사가 나서는 것 보다 흑인 변호사가 맡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존스 변호사가 케이스를 듣자 딱 두 가지 질문을 했다. 혹시 가해자가 한인이냐. 피해자는 흑인이냐.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거절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 말 안 하던 존스 변호사는 케이스를 맡겠다고 했다. 너무 고마웠다.”
재판에 방해될까 숨어서 도와
존스 변호사는 조사관을 시켜 흑인 여학생 주변을 샅샅이 조사해 평소 이 학생이 친구들에게 ‘한인 리커스토어를 털겠다’고 말한 증언을 끌어냈다. 또 폭행사건 이후 “딸의 대학교 학비가 생겼다”고 자랑하고 다닌 부모의 증언도 찾아냈다. 민 변호사는 숨어서 사건을 도왔다. 한인이 나설 경우 재판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계획된 범죄가 드러나자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를 조용히 부르더니 케이스를 기각시켰다.
폭동 이후에는 억울하거나 차별적인 이유로 기소되는 한인 케이스가 늘었다. 특히 폭도들로부터 업소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나섰던 한인들이 줄줄이 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체포되고 기소됐다. 민 변호사가 맡았던 사건은 더 황당한 내용이다. 주 방위권의 요청으로 백인 여성을 집까지 데려다주려다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된 케이스였다.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일 때문에 한인타운을 방문했던 이 백인 여성은 폭동으로 버스운행이 중단돼 집까지 돌아갈 교통수단이 없자 길에 서 있던 주 방위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방위군은 마침 자신의 앞을 지나가던 차량을 세워 백인 여성을 데려다줄 수 있는 지 부탁한다. 한인이 운전하던 차 안에는 친구 2명이 더 타고 있었다. 운전사와 친구들은 흔쾌하게 백인 여성을 태운다. 문제는 이 때부터다. 베벌리힐스 진입로인 라시에네가 불러바드에 도착하니 폭도들을 막기 위해 배치된 베벌리힐스 경찰들이 쫙 깔렸다. 이들은 차를 세우더니 불심검문에 들어갔다. 그리고 차 안에서 총기를 발견하고 운전자를 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백인 여성 태워주다 누명도
민 변호사는 “운전사와 친구들은 폭도들로부터 자신들의 업소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한인타운에 가던 중이었다. 그때는 업주들 스스로 총을 들고 업소를 지켰다”며 “주 방위군의 부탁을 듣고 호의를 베풀었는데 오히려 범죄자가 된 셈”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사건을 맡은 민 변호사는 담당 검사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무죄라고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무죄를 입증하려면 당시 차량을 세우고 부탁했던 주 방위군을 찾아오라고 민 변호사에게 요구했다.
민 변호사는 “법적으로 이들의 행동은 정당방위에 해당한다. 또 자신과 상관없이 일어난 폭동으로 재산 피해를 본 건 재해에 해당돼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며 “자신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를 소지한 걸 위법으로 몰아붙이는 검사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고민하던 민 변호사는 LA카운티 검사장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담당 검사의 상관을 만나 케이스가 성립되지 않는 이유를 조목조목 법 조항을 대며 따졌다. 설명을 다 들은 부장 검사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수 개월 동안 끌었던 케이스는 결국 ‘혐의 없음’으로 기각됐다.
LA폭동 그 후
ABC 간판 프로그램이었던 나이트라인에 출현해 당당히 이 사실을 꼬집은 한인이 있다. 바로 한인 2세 앤젤라 오 변호사다. 그는 앵커였던 테드 커플과의 대담에서 한인 사회 입장을 전달하면서 언어장벽에 갇혀 속으로 울분을 삭이던 한인들의 입이 돼줬다. 그는 폭동 이후 백악관 자문기구인 인권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으며, 한인변호사협회(KABA)의 회장을 역임했다.
또 웨스턴정의센터재단(WJCF)의 대표를 맡아 중재활동과 커뮤니티 교육에 앞장섰다.
같은 해 한인민주당협회(KADC)가 발족해 한인사회 정치력 신장을 높이고 민주당 정치인들과 대화 창구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1993년 10월에는 폭동 당시 유일한 한인 희생자인 이재성(당시 18세)군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지원한 폭동 구호기금 123만여 달러를 재원으로 한인장학재단(구 4.29 장학재단)이 설립됐다. 1994년부터 2019년까지 25회에 걸쳐 총 937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1997년에는 한미연합회(KAC)가 한인과 타인종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대표 흑인단체인 마틴 루터 킹 재단과 손을 잡고 4.29 중재조정센터를 설립했다. 이 센터는 LA카운티 분쟁해결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고용주와 직원 간의 갈등, 인종 분쟁 문제에 대한 조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LA폭동 15주년을 맞은 2007년 4월 29일에는 한인과 흑인, 라티노 등 다인종이 참여한 대규모 행진 ‘가교를 위한 발걸음’이 KAC LA지부 주최로 진행됐으며, 2008년에는 LA폭동 당시 한인사회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컬러의 충돌(Clash of Colors)’이 발표돼 1.5세와 2세의 호응을 받기도 했다. 데이비드 김 변호사가 제작한 이 다큐는 정치인과 사회운동가, 기자, 교수 등의 인터뷰를 통해 폭동이 한인 커뮤니티에 남긴 피해와 고통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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