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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수] 변호사 11명 자비 소송…피해 업소들 배상 받아내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민병수 변호사
<10> 흑인 폭동 사건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다

1992 LA폭동 당시 결성된 한인 자경대가 총을 들고 한남체인 앞을 지키고 있는 모습.

1992 LA폭동 당시 결성된 한인 자경대가 총을 들고 한남체인 앞을 지키고 있는 모습.

4·29 LA 폭동 직후 한인타운 중심가에 모인 한인들이 인종 화합을 염원하는 평화 행진을 벌이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4·29 LA 폭동 직후 한인타운 중심가에 모인 한인들이 인종 화합을 염원하는 평화 행진을 벌이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LA시 월권 들어 항소 제기
집단 소송 10곳에 2만불씩
기성 정치인 민낯에 실망
한인 정치력 신장 절실함


“여러분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흑인을 구타한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졌습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분노를 토해내야 합니다... (정적) 합법적으로.”

평소처럼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운전하고 있었다. 갑자기 탐 브래들리 LA시장이 나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1992년 4월 29일 오후 3시40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몇 시간 뒤 사우스 LA 중심가인 플로렌스와 노먼디가 만나는 사거리에는 흑인들이 속속 집결했고 경찰차를 부수고 백인 트럭 운전사를 구타하는 일이 발생했다. 민병수 변호사가 기억하는 LA 폭동의 시작이었다.

“브래들리 시장은 평소 감정이 전혀 없는 차분한 톤으로 말하곤 했다. 몇 번 만나봤기 때문에 그의 성품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날 그는 다분히 감정적이었고 시민들에게 행동하라고 주문했다. 어처구니없던 건 그렇게 흑인들을 선동했던 브래들리 시장이 며칠 후 한인타운에 와서 피해자를 돕고 싶다며 1000달러를 기부했는데 한인 피해자들은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것이다.”

브래들리 시장의 두 얼굴

“만일 그 때 브래들리 시장이 라디오에 나와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폭동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소환한 민병수 변호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LA 폭동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인타운과 한인들이었지만 정치력을 동원한 공격은 계속 됐다.

LA시는 폭동 이후 사우스 LA지역에 다시 문을 여는 한인 업소들에 치안을 핑계로 내세우며 가게 주변에 가로등을 설치하고 낙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주류 판매량도 제한시키는 등 운영 조건을 강화했다. 당시 이를 주도했던 시의원은 마크 리들리-토머스였다. 이를 막을 힘조차 없던 한인 업주들은 평생 지켰던 일터를 떠나야 했다.

1992년 말, 민 변호사는 곽철희(부회장), 토니 김(총무) 변호사와 함께 한미변호사협회(KABA) 산하에 한인법률권익재단을 급하게 조직하고 피해 업주들을 대변해 시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관련 경험도, 지식도 부족했던 만큼 멕시칸권익보호교육기금(MALDEF)을 벤치마크했다. 고형식, 김지영, 그레고리 백 등 11명의 한인 변호사들이 소송을 돕겠다고 자원했다. 이들은 소송비용도 직접 내고 매일 모여 서류를 준비했다.

LA카운티수피리어 법원은 LA시의 불합리한 조건부영업제한(CUP)을 중단시켜달라는 KALDEF의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였지만,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했다. LA시가 토지조정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업소운영 조항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업소 운영 조항은 토지 조정과 관련 없는 문제다. LA시의 월권행위”라고 항소하자 이번엔 LA시가 리커 라이선스는 가주 정부의 관할권이라며 한발 물러났다. 그리고 모든 조건을 다 철회하겠다며 합의를 제안했다.

청년 가세티 삽들고 시늉만

민 변호사는 “당시 우리는 대법원까지 간다는 생각으로 소송을 준비했다. 그러나 시에서는 대법원까지 가면 결과가 뒤바뀔 수 있다는 불안감에 타협을 요구했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줬다. 2년 만에 마무리된 소송은 LA시가 피해 업소당 2만 달러씩 손해배상 비용을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재판 결과를 끈기있게 기다리던 업주 10명은 결국 손해 배상을 받아냈다.

LA 폭동에 대한 민병수 변호사의 감정은 지금까지도 복잡하게 남아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정치인들의 민낯에 대한 실망감, 피해자임에도 외면당한 한인 커뮤니티의 참담한 현실, 그리고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는 한인 정치력에 대한 아쉬움까지 섞였다.

“폭동이 발생한 후 며칠 뒤 한인들이 평화 행진을 벌였다. 그 자리에 에릭 가세티 시장의 아버지(길 가세티)도 LA 카운티 검사장으로 나와서 연설했다. 함께 나왔던 청년 에릭은 삽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일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삽’은 그냥 정치적 퍼포먼스일 뿐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주관과 목표도 바뀐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시간을 더 많이 할애했다. 2003년 LA시의회에서 ‘미주 한인의 날’을 제정한 일도 그 결과물 중 하나다. 특히 미주 한인 이민사가 100년을 맞은 해를 기해 이뤄진 일이라 한인사회에 주는 의미는 더 각별하다. 폭동을 극복한 한인 커뮤니티의 개척정신과 미국 사회에 기여한 헌신적인 활동과 업적을 인정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미주한인재단의 설립 뒤에는 하와이에서 토목 엔지니어링으로 성공한 2세 댄 김씨가 있었다. 김씨의 아버지는 하와이 초기 이민자로, 한인으로 처음 자동차를 살 정도의 부를 이뤘다고 했다. 그는 이민 100주년이 다가오자 미국에 한인 역사를 알릴 것을 기획하고 남가주의 한인 단체장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가수 나훈아 100만불 기부

민 변호사는 “미주 한인 역사를 알리는 행사를 기획하려면 기금이 많이 필요한데 그는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알고 보니 가수 나훈아가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고 말했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재단은 설립됐지만 어떻게 한인 이민사를 알릴지에 대한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때 민 변호사는 ‘미주 한인의 날’ 제정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다. 콜럼버스 데이도 있는데 한인의 날은 왜 없냐는 단순한 논리였다. 세부 사항은 LA시와 주 정부 등에서 보좌관으로 일하며 재단에서 활동하던 1.5세와 2세들이 적극적으로 도왔다.

당시 한인사회를 관할하던 탐 라본지 LA시의원 사무실의 김영지 보좌관을 선두로 케빈 머레이 주 상원의원 보좌관이었던 재니 김, 가든그로브시공무원 제니 이, LA통합교육구(LAUSD) 커뮤니티 담당관이던 홍연아, 변호사 알렉스 차 등이다.

결의안 내용은 민 변호사가 직접 썼다. LA시는 그해 10월 22일, 가주 의회는 2004년 1월 12일 미주 한인의 날 결의안을 채택하고 선포식을 갖는다. 민 변호사는 “한인 1.5세와 2세들이 아니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한인 사회의 업적”이라고 공을 돌렸다.

4·29 LA폭동

1992년 4월 29일 LA에서 발생한 흑인 폭동이다.

1991년 흑인 로드니 킹이 백인 경찰들에 집단 구타당한 사건과 맞물려 같은 해 한인 업주가 흑인 소녀를 총격 살해한 일명 ‘두순자 사건’이 발생하면서 흑인들의 분노가 시작됐다.

주류 언론은 사우스LA에서 발생한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하면서 한인과 흑인 간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로 인해 백인들에 대한 흑인들의 분노가 한인들로 향하게 됐다. 당시 일부 뉴스에는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업주 두순자씨의 얼굴을 수차례 가격한 장면을 삭제·편집한 영상을 내보내면서 한인들이 흑인을 차별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특히 법원이 두순자씨에게 400시간의 사회봉사명령과 집행유예 판결을 내리면서 흑인들의 분노는 더욱 확산됐다.

결국 폭동이 시작되면서 흑인들은 한인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고, 특히 한인 업소들을 대상으로 무분별한 약탈과 방화, 기물 파손을 자행했다.

당시 경찰은 한인 업소들이 몰린 지역을 방치한 채 베버리힐스, 할리우드 등 지역만 보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인들은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자경단을 조직, 자발적으로 총기와 탄약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LA폭동은 4월 29일에 시작돼 5월 3일에야 진정국면으로 들어갔다. 사망자 53명, 부상자 4000명이라는 인명피해를 남겼다.

이로 인해 약 2300개의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었으며, LA시 피해 금액 7억 5000만 달러의 40% 정도인 4억 달러에 달하는 피해를 봤지만, 대부분이 지역·연방 정부로부터 보상받지 못했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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