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수] “친구를 쐈어요”…첫 살인사건 의뢰인은 고교생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민병수 변호사
<7> 초짜 변호사에게 밀려드는 사건들
검찰 잘못된 기소로 ‘기각’
갱단이 판치던 70~90년대
한인타운 유명 사건 도맡아
이제 막 자격증을 딴 초짜 아시안 변호사에게 누가 의뢰할까. 당차게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지만 내심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은퇴 연금으로 1년은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모두 기우였다.
“술 먹고 차를 몰다 걸렸어요”, “성범죄자로 억울하게 잡혔습니다.”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마치 민 변호사를 기다렸다는 듯 고객들은 밀려들기 시작했다.
첫 살인사건을 맡다
어느 날이다. 누군가 다급히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열어보니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인 남학생 3명이 서 있었다.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머뭇거리며 들어온 이들을 자리에 앉혔다. 찾아온 연유를 물었다. “사람을 죽였어요.”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엔 떨림이 가득했다.
민 변호사는 “학생들에게 ‘지금 여기는 어떻게 왔냐’고 물어보니 ‘경찰이 풀어줬다’고 하더라.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내 귀를 의심했다”며 “어린 학생들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친구가 죽었다며 도와달라고 말하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고 회고했다.
사건의 전말이 기가 막히다. 친구 사이였던 4명은 학교 수업을 빼먹고 사망한 친구 집에 모였다. 그 친구의 집은 부모가 맞벌이해서 늘 비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놀러갔다고 했다. 이 친구는 얼마 전 아버지가 산 총을 꺼내 보여주며 자랑했다. 나중에 보니 그 아버지는 정식으로 라이선스를 받고 총을 산 것이었다.
난생 처음 총을 구경한 친구들은 서로를 겨누며 장난치다가 진짜 방아쇠를 당겼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당황한 친구들은 시신을 차에 태워 병원에 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병원의 신고로 경찰들이 왔다.
그러나 사건은 예기치 못한 곳으로 흘러갔다. 경찰은 학생들의 진술을 듣더니 같은 학교에 다니던 다른 아시안 학생을 용의자로 체포한 것이다. 알고 보니 경찰의 추궁에 다른 아이가 죽였다고 둘러댄 아이들의 진술에 따른 것이다. 용의자로 체포된 학생은 갱단으로 전과가 있었기에 아무리 “내가 아니다”라고 주장해도 경찰들이 믿지 않았다.
"무조건 묵비권 행사하라"
민 변호사는 학생들에게 “조사가 다시 나오면 무조건 묵비권을 행사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법정에 출두하게 되면 같이 나가겠다고 약속하고 일단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음의 갈등이 시작됐다. 그는 “경찰에 허위 진술을 한 학생들의 변호를 맡자니 양심에 걸렸고, 그렇다고 변호사의 자격을 버릴 순 없었다”고 당시 심정을 설명했다.
진실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다음 날부터 벌써 학급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민 변호사는 “그 소문을 들은 급우의 부모가 담당 검사한테 사실을 얘기해 사건이 재수사에 들어갔고, 무고하게 감옥에 있던 아시안 갱단원은 풀려났다”며 “검사가 케이스를 기각했다. 다른 한인 친구들은 아예 검찰에 기소된 적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그렇게 사건이 마무리됐다”고 전했다.
그때 남은 친구 세 명은 어떻게 됐을까? “그 사건 후로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어렴풋이 한 명은 한국에 가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다”는 민 변호사는 “나의 도덕적 양심과 법조윤리가 극적으로 상충했던 사건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동경암 사건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후 한인 커뮤니티에서 발생한 굵직한 사건에 민 변호사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다.
1987년 LA의 한인 갱단과 한국에서 온 조직폭력단이 벌인 살인사건이 한인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동경암 살인’으로 불린 사건 뒤에도 민 변호사가 있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갱단원이었던 한인 용의자는 식당에 들어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인 손님에게 “안녕하세요” 인사한 뒤 총기를 무참히 난사했다. 범인이 노린 건 LAPD 한인 수사관이던 한상진 경관이었다. 하지만 무고한 식당 손님 1명만 총에 맞아 숨졌고, 다른 1명이 크게 다쳤다. 경찰은 범인을 잡기 위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민 변호사가 맡은 의뢰인은 당시 총을 쐈던 용의자의 10대 한인 룸메이트였다. 경찰은 이 룸메이트도 같은 갱단원으로 의심해 압박 수사를 벌이고 있었다. 민 변호사는 “그 당시엔 한 사람 이상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어도 갱단으로 여겼다. 당시 한인 가정들은 맞벌이를 많이 했고, 아이들도 갈 곳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잦았다. 그러다 나쁜 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상황을 전했다.
결국 룸메이트는 혐의를 벗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민 변호사가 묵비권을 행사할 것을 당부했던 게 결정적이었다. 민 변호사는 “경찰의 압박 수사를 받으면 하지도 않은 범행을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의뢰인에게 묵비권을 행사하라고 당부했다”며 “결국 경찰은 공범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고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고 말했다.
모래시계파 아이칸 사건
비슷한 사건으로 1995년 발생한 모래시계파 아이칸 살인사건도 있다. 모래시계파 단원 최상수(당시 27세), 김만수(당시 27세)가 라이벌이었던 한인 갱단 ‘코리안 플레이보이스’ 두목 임치성(당시 23세)에 총격을 가해 살해한 사건이다. 민 변호사는 사건의 용의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된 한인 김기범씨의 변호를 맡았다. 김씨는 한인 갱단이던 ‘코리안킬러스’의 멤버로 당시 사건 현장이었던 아이칸 카페에 모래시계파 단원들과 함께 있었다.
민 변호사는 조사 과정에서 경찰은 “지금 사실대로 말하면 선처해 주겠다며 압박한다. 범인이 아니더라도 조사실 의자에 앉아있으면 심리적으로 위축돼서 이실직고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잘못 말하면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 의뢰인에게 묵비권을 사용할 것을 다짐받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결국 묵비권을 지킨 김씨는 살인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것이 확인돼 무죄로 풀려났다.
(※ 본 편에서 유독 묵비권 부분이 강조된다. 비록 오래전 일이지만 민 변호사는 구체적인 사건 내용과 변론에 대해서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아마도 직업상 윤리에 따른 신중함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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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인사회는
경제적인 기반이 조금씩 닦여가던 1970년대 후반부터 한인사회에는 갱단들이 등장한다. 주로 10대들로 구성됐던 이들은 빈집을 털고 마약을 일삼았다.
당시 유명했던 한인 갱단 조직은 ’아메리칸 버거‘. 80년대엔 ’코리안 킬러스(Korean Killers)‘라는 조직이 한인타운을 장악한다. 이후 ’코리안 플레이보이스‘가 나오며 세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한인 여성 갱단도 있었다. 이들은 ’코리안 걸스 킬러스(Korean Girl‘s Killer)’로 불렸다.
한인 갱단들이 있던 한인타운은 당시 악명 높았던 멕시코 갱단이나 흑인 갱단들도 함부로 넘보지 못했을 정도로 조직력이나 실력이 막강했다.
민 변호사는 “입단식 때 관행으로 담뱃불을 몸에 지졌는데 이 흉터가 갱단원임을 말해주는 표식이었다. 한인 청소년들이 경찰에 체포되면 소매를 걷어 올려서 갱단원인지를 확인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들려줬다.
1990년대에는 한국에서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온 조직폭력배들로 구성된 ‘모래시계파’ 조직이 활동했다. 당시 경찰들이 파악한 규모는 30~40명 선. 이들은 한인타운 내 업소들에서 소위 말하는 ‘자릿세’를 거두고 금품을 탈취했다. 이 과정에서 2세들로 주축이 된 한인 갱단들과 세력 다툼을 자주 벌였다. 아이칸 살인사건도 그런 세력 전쟁의 하나였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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