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수] “팔을 부러뜨려서라도 군에 남아라” 기구한 훈련병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민병수 변호사
<5> 우여곡절 끝에 학생 비자를 얻다
“불체자 신분은 입대 안된다”
재정 보증에 학비도 지원해줘
LA의 날씨가 사막의 겨울처럼 춥던 1954년 11월 어느 날. 민 변호사는 미군에서 징병 통지서를 받는다. 한국전쟁 때문에 18세 이상 유학생도 병역 의무를 질 때였다.
당시엔 90일 동안 미군에 복무하면 영주권을 주던 시절이다. 영주권을 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민 변호사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묵묵히 신병훈련소로 떠났다.
민 변호사가 도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80마일 떨어진 몬터레이 카운티에 있는 포트 오드 훈련소였다. 육군사령부 소속 보병 부대 훈련소였던 이곳은 지금도 행정건물, 막사, 메스홀, 텐트 패드, 하수처리장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는 국방부가 운영하는 국방외국어대학(DLI)에서 언어 훈련 기지로 사용한다.
IQ 검사에 사관학교 제의
신병 훈련은 8주 동안 진행됐다. 이제 부대를 배치받고 한 달만 더 있으면 기다리던 영주권을 받는다. 게다가 신병훈련소에서 뜻밖의 제의도 받았다. 대대장이 민 변호사를 호출하더니 “우리는 너 같은 인재를 찾고 있었다. 군대에서 무료로 사관학교에 보내줄 수 있는데 가겠느냐”는 권유였다. 알고 보니 군대에서 신병 150명에게 실시한 IQ 테스트 결과 민 변호사가 두 번 째로 높은 수치를 기록한 것이다. 1등은 폴리텍 고등학교에 같이 다닌 일본계 친구 케이 아카마수였다.
민 변호사는 “사관학교 입학 제의를 받는데 망설일 게 없었다. 영주권이 해결됐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사관학교에 가겠다고 했다”며 “또 한 번의 기적을 만난 것 같았다”고 당시 심정을 표현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훈련을 받으러 숙소를 나오는 길에 검은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잠시 후 부대원 몇 명이 호출됐다. 민 변호사의 이름도 불렸다. 알고 보니 차량 탑승자들은 이민국에서 나온 직원들이었고 불려 나간 신병들은 모조리 배경 조사 과정에서 걸린 외국인들이었다.
민 변호사는 이민국 직원에게 사실대로 신병훈련소에 오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며칠 뒤 이민국은 “미군이 징병 과정에서 실수했다. 당신은 불법체류 신분이기 때문에 귀국해야 한다”는 통지서를 민 변호사에게 발송했다.
훈련소도 당황했다. 민 변호사를 대변한 육군 법무병과(US Army Judge Advocate General‘s Corps) 소속 법무관은 “이민국이 반대하기 때문에 군대에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없다”면서도 “이민국에서 훈련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편지만 받아오라”고 민 변호사를 설득했다.
짐승 취급한 이민관의 매정함
민 변호사는 살리나스 이민국에 찾아갔다. 육군 법무관의 이름을 대며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하자 이민관은 민 변호사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의 책상 앞에는 이미 그와 관련된 서류가 쌓여 있었다.
“이민관은 내가 말하는 내내 실실 웃었다. 짐승처럼 취급하는 듯한 그의 비웃음과 행동을 보면서 돌아가자고 결심했다.”
부대에 돌아와 짐을 싸자 부대원들은 말렸다. “팔을 부러뜨리고 병원에 입원해 있어라.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은 군대에서 쫓아내질 못한다.” “샤워를 하고 밖에서 잠을 자면 지독한 독감에 걸린다. 그러면 2주 정도 입원할 수 있다.” 민 변호사의 사정을 아는 부대원들은 갖가지 아이디어를 주면서 90일을 채우라고 설득했지만 민 변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민 변호사는 이민국에 자진 출국을 신고하고 2개월여 만에 LA의 집으로 돌아왔다.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멕시코에 가서 비자를 받고 재입국하는 길이다.
민 변호사는 “내게 남은 마지막 길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해봤기에 이제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만 남았다”고 말했다.
멕시코로 가는 길에는 은인 두 명이 동행한다. 한 명은 민 변호사가 의지하던 형 헨리 이씨. 당시 영어를 잘하는 한인은 드물었기에 그의 동행은 민 변호사에게 힘이 됐다.
민 변호사보다 7살 정도 많은 이씨는 당시 아시안 인종차별주의가 팽배하고 백인 중심이었던 대학에서 한인으로는 처음 학생회장을 맡았을 만큼 역사적인 인물로 꼽힌다고 민 변호사는 회고했다. 민 변호사의 아버지가 워싱턴DC에 있는 국무부에서 일할 때 한국에서 온 공무원들을 통역하던 이씨를 처음 만났고, 그 후 이씨는 가족이 있는 LA로 올 때마다 민 변호사를 찾아오면서 친분이 생겼다.
잊을 수 없는 젠킨스 박사
또 다른 은인은 나중에 민 변호사의 후견인이 된 룰루 마리 젠킨스 박사다. 젠킨스 박사 역시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됐는데 아이오와에 있는 여대 학장직을 은퇴한 후 LA에 살면서 가끔 민 변호사의 가족을 만나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곤했다. 민 변호사가 비자를 받기 위해 제출해야 했던 재정보증서도 젠킨스 박사가 해줬다. 비자를 받고 돌아온 민 변호사가 대학에 진학할 때 4년간의 학비를 지원해주고, 나중에 교사가 될 것을 권유한 것도 젠킨스 박사였다.
민 변호사는 “독신이었던 젠킨스 박사는 우리 가족과 이해관계도 없었지만,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학비도 취직하면 그때 갚으라고 했다. 그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여행자처럼 보이기 위해 편하게 옷을 차려입었다. 영어가 유창한 아시안 남성이 운전하고 금발의 백인 중년여성이 동행한 차량을 의심해 막아서는 미국 국경수비대원은 없었다. 민 변호사는 무사히 멕시코 국경을 통과해 티후아나에 있는 미국 영사관을 찾아가 학생비자(F1)를 받고 안전하게 LA로 돌아왔다. 드디어 체류신분이 해결된 민 변호사는 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라번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후 교사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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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인 사회는
헬기 사고로 떠난 은인
미국이 징병제를 실시한 건 1783년 독립전쟁 때다. 당시에는 추첨 방식으로 운영됐는데 1차 대전 이후 400만명의 군대가 필요해 징병이 이뤄졌다. 이때 정부는 체계적인 징병제를 위해 1917년 ’선발징병청(Selective Service System·SSS)‘을 설치해 21~30세의 모든 남성을 병역자원으로 등록시켰다. 한국전쟁(1950∼1953년) 당시에는 징병제로 152만 9537명이 입대했다. 이때 징집은 긴급하게 실시됐다. 2차대전(1939년~1945년)이 끝난 후 미국은 1948년부터 99만 명 이하까지 감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SSS는 징병 대상자를 18.5세부터 26세까지로 하한선을 낮췄고, 복무 기간도 기존 21개월에서 24개월로 늘렸다.
민병수 변호사의 영주권 취득 여정에 함께했던 헨리 이씨도 자원 입대해 일본 오키나와에서 복무했다. 민 변호사에 따르면 이씨는 한인 최초로 ’월드뱅크‘에 입사했으나 근무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졌다.
본지는 월드뱅크 측에 이씨의 근무기록을 문의했지만 5일 현재까지 답변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월드뱅크 기록에서 1962년 8월 태국으로 향하던 헬리콥터가 추락해 직원 2명이 숨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민 변호사는 “당시 헨리형은 ’우리 세대에 아시안이 내각에 들어갈 것‘이라고 내다봤었다. 난 그때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을 보면 그때 그 형의 선견지명에 놀라게 된다”고 말했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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