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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수] 중3 때 인천 부둣가 흙 한 줌 주머니에 넣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민병수 변호사(1)

민병수 변호사가 자택에서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왼쪽 눈은 보호대를 착용한 상태다. 김상진 기자

민병수 변호사가 자택에서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왼쪽 눈은 보호대를 착용한 상태다. 김상진 기자

LA총영사관 초대 영사로 부임한 민희식 총영사와 가족들을 초청한 환영 만찬 사진. 앞줄 오른쪽이 민 변호사. [민병수 변호사 제공]

LA총영사관 초대 영사로 부임한 민희식 총영사와 가족들을 초청한 환영 만찬 사진. 앞줄 오른쪽이 민 변호사. [민병수 변호사 제공]

‘남기고 싶은 이야기’의 첫 주인공은 민병수 변호사(87)다. LA한인사회의 초대 영사로 부임한 고 민희식(1948년 10월~1960년 8월) 총영사의 둘째 아들로 LA에 온 후 지금까지 남아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했다. 초기 한인사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인사회의 정치·사회적 성장에 기여한 그의 활동과 암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1.5세와 2세들의 친구로 남아 있는 민 변호사에게 한인 2~3세들에게 남겨줄 교훈을 들어봤다.

<1> 추방 통보 받고 멕시코로



독립자금 댄 큰할아버지 걱정
일찌감치 부친 미국으로 유학
10학년 편입…영어 수업은 고문
유학생들은 대부분 하급 노동


차창 밖이 희미하게 밝아진다. 미국에 남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마지막 남은 동아줄을 잡기 위해 멕시코 국경을 향해 떠나는 길이다. 자정을 지나 출발한 차 안은 덜컹거리는 소음만 있을 뿐 조용하다. 새벽을 맞는 프리웨이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건물과 나무, 차들의 모습을 뜨거워지는 눈에 꾹꾹 눌러 담았다.

국경서 체포되면 그걸로 끝

아버지(고 민희식 초대 LA 총영사)가 한국으로 귀국한 후 남은 가족들의 고생은 말할 수가 없었다. 외교관 가족으로의 체류 신분이 만료돼 이민국(INS·현 이민서비스국)에서 발송한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추방 통지서가 수시로 도착했다.

하지만 한국은 전쟁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지만,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멕시코에 가서 유학비자를 받아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짐과 서류를 챙겼다. 이미 체류 신분이 만료된 상황이라 국경에서 체포되면 가족들이 있는 LA로 돌아올 수도 없다. ‘다시 이곳에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을까? 지금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니 울컥해졌다.
조선 시대 명문가였던 민 변호사의 가족사는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조국의 아픈 역사와 그 궤를 같이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댔던 큰할아버지(민영달·이조판서)는 혹시라도 그 사실이 발각돼 가족들이 고초를 겪을까 싶어 민 변호사의 부친을 일찌감치 미국에 유학보냈다.
1915년 콜로라도주에 있는 광산학교에 입학한 아버지는 1924년 UC버클리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 할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에 임명된 아버지는 1년도 채 안 돼 LA 총영사로 발령받아 1960년까지 12년 동안 재직했다.

경기중 3학년 때 미국으로

아버지를 따라 LA로 출발한 건 1948년 11월 25일. 민 변호사는 경기중학교 3학년을 마친 15살이었다. 2차 대전 이후인 당시 항공사는 판아메리칸 항공사(1991년 도산함)를 포함해 2개뿐이었다. 티켓 가격은 700~800달러 정도로 비쌌지만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강했다. 반면 배편은 300~350달러 정도로 저렴했다. 당시 미국을 왕래하는 배는 미군과 화물을 실어나르던 배였다.

미국으로 출발을 앞둔 민 변호사는 인천 부둣가에서 흙 한 줌을 주머니에 넣었다. 민 변호사는 “어린 나이에 외국에 나가 산다는 게 너무 신났다. 한편으론 집과 친구들을 두고 떠나는 게 슬펐다. 언제 한국에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먹에 담긴 흙은 조국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나 자신의 맹세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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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한인 사회는

LA 총영사관이 문을 연 것은 민 총영사가 도착한 2개월 후인 1949년 1월이다. 당시 다운타운 브로드웨이와 5가가 만나는 곳에 있었다. 직원은 총영사 외에 주사 한 명, 사무원 한 명이었다. 초대 LA 총영사의 주 업무는 한인들 인구조사를 하는 것과 25명가량이던 유학생들을 돕는 것, 둘로 갈라져 있는 동지회와 국민회를 화해시키는 것, 한국이라는 나라를 미국인들에게 알리는 것 등이었다.

남가주 한인은 1, 2, 3세를 모두 합해 1000명이 채 안 됐다. 유학생들은 언어 문제뿐만 아니라 심한 인종차별 때문에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워 극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었다. 민 변호사는 “대부분 유학생은 하급 노동밖에 할 수 없었다”며 “어머니(전부귀·1998년 작고)가 힘든 유학생들을 집에 초청해 식사를 자주 대접하곤 했다”고 전했다.

반면 LA 다운타운은 지금과 사뭇 다른, 깨끗하고 화려한 상업중심지였다. 사람들은 다운타운에서 쇼핑하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겼다. 지금은 사무실 거리로 바뀐 윌셔가에도 고급 백화점들이 즐비한 백인들만의 거리였다.

가족들이 살던 공관은 지금 LA 한인타운에서는 조금 떨어진 21가와 그래머시에 있었다. 백인 거주자가 대다수였던 지역이었다. 당시만 해도 흑인은 거리에서 지나가는 타인종의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억압된 분위기에 살고 있었다. 한인들은 지금의 한인타운이 결성되기 전이라 일본계와 중국계 등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장연화·장수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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