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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숨은 분노

"사건의 드러난 모습만 보고
신문에 실린 기사만 읽고
비난하거나 비평하곤 한다
우리는 드라마 보는 것처럼
원하는 장면만 확대해 본다"

흑인 ‘조지 플로이드’ 의 죽음으로 분노의 물결이 ‘Black Live Matter’로 확산하는 뉴스를 접하면서 떠오르는 한 추억이 있다.

포병 장교로 최전방 철책선에 배치된 후 처음 갖는 휴가였다. 따사한 봄볕이 이곳 강원도 깊은 산속까지 성큼 다가왔다. 눈 녹은 자락마다 푸른 생명이 활기를 돋우고, 성질 급한 것들은 벌써 색감을 준비하고, 노란색 빨간색 물감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그동안 정훈장교의 직무를 맡아서 병사들의 정신무장과 사기진작 교육을 담당해 왔다. 당시에는 포대마다 숙소에서 포문까지 지하터널로 연결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유사시에 적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고 포문을 작동할 수 있도록 계획된 것이다. 따라서 병사들은 전투 훈련보다는 지하터널 ‘건설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의 상처투성인 육체와 아픈 마음을 다독거리기엔 내 마음이 너무 여렸다.

고통받는 그들의 마음을 마음껏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정신적 압박감과 ‘군’이라는 무지막지한 큰 산 앞에 그저 한낱 도구로밖에 쓰이지 못하는 자신이 처참했다.

화창한 봄날, 잠시라도 이 모든 것을 벗어나는 날이다. 갓 세탁하여 풀로 날이 선 장교복을 입고 소위 딱지가 붙은 모자를 쓰고, 최북단 조그마한 ‘ㅇ’ 버스 정류장에서 서성거리는 자신을 본다. 딱히 애인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휴가간다는 기쁜 소식을 알릴 사람도 없는 서울을 향하여 그냥 살벌한 이곳을 벗어 날 뿐이다.

매일의 일상이 떠오른다. 동트기 전 6시에 기상하고 5km 정도 구보하고 아침 식사 후에, 바로 3인 1조로 험한 산에 오른다. 길이 2m 이상, 직경 15cm 이상의 원목을 재래식 톱으로 잘라서 가지를 치고 쇠고리를 박고 철삿줄을 매고 손으로 끌면서 어깨에 메고 비틀거린다. 길도 없는 가파른 산속을 가로질러 2km 거리의 부대 연병장까지 운반하는 작업이다. 조당 하루 2개의 원목이 할당되어 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기압과 더불어 그날 저녁 급식은 없다. 몸은 지칠 대로 지치고, 잠이 쏟아지며, 끄덕이는 머리를 세우느라 깜짝깜짝 놀라는 사병들을 대상으로 밤늦게까지 정훈 교육을 해야 하는 현실이 가슴 저렸다.

색 바랜 완행버스가 삐걱 멈추었다. 흩날리는 먼지로 상념에서 깨어나 버스에 올랐다. 작은 보따리를 움켜쥔 몇몇 아낙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본다. 산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랑곳없는 가난에 찌든 표정이다. 달콤한 봄바람은 차창으로 스며들고 산기슭에는 여기저기 붉은 너울이 인다. 철쭉꽃인가 보다.

조그만 도시를 몇 개 지나면서 승객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봄맞이로 화려한 노란 색, 분홍색 짧은 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들이 재잘거리며 오른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깔깔거리고 희희낙락거리며 소란스럽다. 전방에 들어간 후 일 년여 보지 못한 발랄한 아가씨들이다.

향기가 풍기는 산뜻한 여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요기가 되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 이상한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사병들은 산속에서 처참한 고생을 하는데 너희들은 무엇이 그렇게 좋아 시시덕거리느냐?’ 정말, 총이라도 쥐여주면 쏠 것 같은 울컥한 심정이다.

얼마 전 의정부 부근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이 떠오른다. 탈영병 한 명이 버스 안에서 카빈총을 난사한 사건이다. 당시는 ‘정신 나간 놈이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의 마음을 추측해 본다. 나는 실제로 육체적 노동이나 고통을 받지도 않았다. 그저 옆에서 보기만 했는데도, 깔깔대는 저들을 보고 희열이 아닌 분노의 감정이 솟아오르는데….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은 병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전방에 근무하는 병사들의 근황을 보면, 대졸은커녕 고졸이 한두 명 정도이고, 어쩌면 모두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시골 출신이다. 학력이 높은 병사들, 대도시 출신들은 다 어디로 빠져 나갔는지? 돈 없고 ‘빽’ 없어서 전방 오지에 배치된 저들의 소외감. 상사로부터 받는 모멸과 혹독한 벌칙. 결국, 죽음을 무릅쓰고 탈영을 했을 것이며, 낄낄거리는 저들을 향하여 분노의 총알을 당겼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마음을 가라앉혀 본다.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삶, 인정받지 못하는 삶, 억압받는 삶에 대한 저항이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음을 느낀다. 항상 순하고 복종만 하며 남에게 한 번도 대들어 본 적이 없는 나에게도, 내면 깊숙한 곳에 이런 분노의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어떤 사건의 드러난 모습만 보고, 신문에 실은 기사만 읽고, 누구를 비난하거나 비평하곤 했다. 누군가 말했다. ‘우리는, 인생을 드라마 보는 것처럼, 보고 싶은 장면만 확대하여 본다’라고….

병사가 군에 입대하는 장면 1-2초, 그러고 자막에는 ‘2년 후’, 장면이 바뀌며 의정부 시내의 간판을 배경으로 버스에 오르는 병사, 그리고 카빈총을 난사하는 총성과 아수라장이 된 극적인 장면. 배경 음악과 더불어 우리는 격한 감정을 일으킨다. 이것만 보고 병사를 손가락질하며 심한 비난을 가한다.

그렇다. 나타나지 않은 2년. 그동안 그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관심도 없고, 총을 휘두르는 광란의 얼굴만 클로즈업 된다.

나타나지 않은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와 열린 마음으로 숨은 모습을 볼 수 있는 삶. 드라마에 가려져 있는, 실제 삶의 순간순간을 이해해야 하리라.

차창 문을 열고,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애인의 반가운 입맞춤으로 느껴질 때까지, 따사로운 봄기운을 힘껏 들이마시며 심호흡해 보던 그때를 생각하며 혼자 씩 웃어본다.


이주혁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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