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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시계를 고르면서

"시계를 고르면서도
여러 조건 따지는데
그보다 몇 배 중요한
일생의 배우자를
왜 아무 조건 없이
덥석 고르고 말았을까"

몇 시나 됐을까. 시간이 궁금하면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시계가 흔한 세상이다. 가장 가까이는 손에서 놓지 않는 스마트폰, 조금 멀리 눈을 돌려도 전광판이나 건물 외벽에도 쉽게 눈에 띄어 시간을 알려준다.

차와 함께 생활하는 요즈음엔 더욱더 그러하다. 움직이는 나만의 공간인 차 안에는 시계가 있고, 음악도 듣고, 수다 떠는 전화도 있다. 그래서인지 팔목에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이 전처럼 많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촌스럽다며 놀리기도 한다. 이런 세태인 줄 알면서도 나의 외출 마지막 점검은 왼쪽 팔목에 시계를 차는 일이다. 전에는 어땠는지 기억도 없다. 굳이 시간을 알 필요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해져 있는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시간은 자연히 알게 되었다. 관심도 줄고 푸대접받는 신세가 되었지만 시계도 한때는 귀한 물건이었다.

오래전 일이다. 중학교 다닐 때이니 시계가 귀하던 시절이다. 은행원이었던 언니가 새것을 장만했다. 쓰던 것이어도 내 것이 생겼다는 기쁨에 밤잠을 설쳤다. 이튿날 도시락 챙기는 것도 잊은 채 학교에 당도하니 경비 아저씨도 보이지 않고 교문은 굳게 닫힌 이른 아침이었다.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했던 그 날의 등굣길은 길고도 지루했다.

시계를 손목에 차기 시작한 것은 산에 다니고부터다. 산에 오르면 이 세상의 모든 문명과는 잠시 차단된다. 함께 오르는 일행이 있지만, 때론 혼자 걷게 되는 시간과 거리가 만만찮다. 해 기울임을 짐작해 시간을 알기엔 내 촉감이 무디다. 십 년 넘게 나와 고락을 같이 한 시계가 얼마 전부터 가다 쉬다 반복하더니 마침내 멈춰 버렸다. 험한 길을 다니느라 유리 뚜껑엔 상처투성이지만 오래된 물건이라 애착이 갔다. 고쳐 보려고 시계 수리점에 갔다. 주인은 비싼 시계도 아닌데 뭘 고치려 하느냐는 노골적인 표정으로 물에 빠졌던 시계는 고쳐도 오래가지 못한단다. 물에 빠트린 기억은 없지만, 비 오는 날에도 산행을 했으니 빗물이 새어들었나 보다.



인연은 사람끼리만의 몫은 아니다. 인연이 다한 시계는 이제 안녕을 고하고 새것을 장만하기로 했다.

우선 구매하기로 한 조건을 하나하나 짚었다. 첫째는 언제 어디서나 쉽게 시간을 볼 수 있게 얼굴이 커야 하고, 시간을 가르치는 숫자는 1, 2, 3…12까지 될 수 있으면 짙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바늘은 어두울 때도 자체 발광이 되는 야광판이어야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가격이 저렴한 것이다.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나 쉽게 찾을 수 없어 아직도 내 왼쪽 팔목은 허전하다. “아무거나 사지 뭘 그리 까다롭게 고르느냐”고 옆에서 남편이 거든다. 아무거나 축에 속하는 시계 하나 고르면서도 몇 개의 조건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그보다 몇 배 중요한 일생을 함께할 배우자를 왜 아무 조건 없이 덥석 고르고 말았을까. 사랑에 목맨 조건도 아니었다.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싱거운 그저 편한 사람. 서로가 결혼을 거부할만한 결격 사유가 없었고, 당시의 분위기가 어쩐지 결혼이라는 것을 해야 사람대접을 받을 것 같았다. 쉽게 이해되진 않지만 그 정도다.

몇 시쯤 됐나. 습관적으로 왼쪽 팔을 걷어 올리니 허전하다. 이 허전함이 싫어서라도 어지간한 것이라도 골라야겠다. 또 누가 알랴? 아무 조건 없이 덥석 고른 남편과 곧 금혼이 되는 사십 팔 년이란 세월을 보냈으니, 덥석 고른 시계가 오래도록 나를 편안하게 해줄는지 모를 일 아닌가.


최근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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