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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좇아 좀 떨어져 살면 어때…그게 ‘창의적 부부’

'세컨드 라이프' 중년 부부의 자세

‘부부는 한집 살아야’ 관념에 갇혀
‘나’는 다 빠진 채 겉만 좋은 부부
뜨개질 취미인 아내 손 끌고 산행?
자신만의 시간 찾으려 상대 무시


얼마 전 아침 방송에서 세컨드 라이프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은퇴 이후 인생의 두 번째 청춘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물어보자 한 중년의 남자 게스트가 말했다.

“저는 애들 다 크면 서울 생활 정리하고 귀어(歸魚)할 생각이에요. 작은 배를 사서 낚시도 하고, 집은 게스트하우스처럼 꾸며서 가끔씩 지인들 불러서 맛있는 것 해먹으면서 재미있게 살고 싶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아내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자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말도 못 꺼내게 하죠. 아내는 도시 여자라 어촌에서는 못 산대요.”

말은 그렇게 해도 표정을 보니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한 그의 로망이자 꿈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아내를 설득하면 되겠냐’는 그에게 내가 준 해법은 아주 심플했다.

“아내가 반대해도 귀어 꼭 하세요. 대신에 서울에 살고 싶다는 아내 뜻도 존중해줘요. 부부가 30년 가까이 같이 살았으면 충분하잖아요. 이제는 두 사람이 살아가는 형태를 좀 ‘창의적으로’ 바꿔봐요.”

'손잡고 함께 취미 생활’ 프레임 깨야

지금 중년의 시절을 보내고있는 우리는 결혼에 관한 수많은 규칙과 불문율 속에서 살아왔다. 내가 스물다섯에 결혼할 때만 해도 여자는 20대 중반, 남자는 20대 후반이면 가정을 꾸리는 게 당연했다. 60년 같이 살아갈 동반자를 선택하는 어마어마한 일을 그 어린 나이에 해치워버린 것이다. 철모르는 20대가 뭘 아나.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머지 반쪽을 선택할 성숙함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결혼은 ‘이 세상 최고의 무모하면서도 불확실한 도전’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보수적인 결혼 시스템은 끝내는 것도 보통 복잡한 게 아니다. 들어갈 때는 예식장이나 구청에서 해결하지만 나올 때는 반드시 법원을 거쳐야만 한다. 때문에 우리는 한번쯤 자신에게 반드시 물어봤어야 한다. 나는 결혼에 적합한 사람인가? 나는 부모가 되어도 괜찮은 사람인가? 그러나 남들의 시선과 사회적 알람에 따라 우리는 이 중요한 질문과 선택을 건너뛰어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사회가 정해놓은 룰에 따라 ‘경쟁력 있는 가정 만들기’에 돌입했다. 남편은 일해서 돈 벌고, 아내는 그 돈으로 자녀교육을 시키고, 아이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는 프로젝트팀이 탄생하는 것이다. 결국 ‘아이가 얼마나 좋은 대학에 갔느냐’ 그 결과에 따라 부부의 20년 결혼 생활 점수가 매겨진다.

퍼스트 라이프가 끝났을 때 우리에게 크고 작은 상처가 남는 것도 그 때문이다. ‘회사 은퇴하니 여유 생겨 좋다’는 남편의 말 이면에는 ‘아직 능력 있는데 2년만 더 써주지…’라는 쓰디쓴 독백이 깔려있다. 회사 바깥에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애들이 독립하니 홀가분해요”라는 아내의 말에도 ‘이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라는 혼잣말이 숨어있다.

엄마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피하고 싶었던 진리와 마주한다. 인간은 절대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과’가 안 날 수 있는 것이 바로 한 생명을 낳고 키우는 일이다. 운이 좋아 자녀가 잘된다 해도 아이를 유학 보내느라

노후에 자금난을 겪거나 부부 관계가 무너지는 집이 허다하다.

가족 관계건 돈이건 건강이건 균형이 깨지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인간사다. 그래서 우리의 세컨드 라이프는 대부분 상처와 함께 시작된다. 부족하고 어설펐던 서로와 살아주느라, 고된 밥벌이의 시간을 살아내느라 부부 둘 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그간의 상처를 보듬어주면서 미뤄왔던 서로의 꿈과 로망을 찾아가도록 격려하고 지원해줄 사람도 둘밖에 없다. 그런데 이때 많은 부부가 자신도 모르게 ‘반칙’을 한다. ‘화목한 부부’의 프레임에 갇혀 서로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가장 흔한 사례가 비슷한 취미를 강요하는 것이다. 뜨개질이 취미인 아내를 주말마다 산에 끌고 다니는 남편들이여, 여행 싫어하는 남편을 자꾸 비행기에 태우려는 아내들이여, 그런 게 바로 반칙이다. 당신 옆의 아내와 남편은 어제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다. 취미가 똑같은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육체가 다르면 재능이 다르고, 좋아하는 일이 다르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정상이다. 게다가 우리는 한집에 살았어도 각자의 시간을 각자의 장소에서 너무 오래 보냈다. 부부의 관심사와 취미가 달라지는 것도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많은 부부가 ‘손 잡고 함께 취미 생활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중년 부부의 이미지’에 갇혀 세컨드 라이프마저 나다운 선택을 주저한다. 자신만의 시간을 찾으려는 상대를 주저앉히기도 한다. 그러나 꿈과 로망, ‘나’는 다 빠진 채 무기력하게 남들 보기에만 좋은 부부로 24시간 같이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컨드 라이프에서는 상대방을 무릎 꿇릴 게 아니고 서로의 무릎을 맞대고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그동안 애들 키우고 먹고사느라 너무 고생 많았지, 당신은 지금부터 어떻게 살고 싶어?’

지인 중 한 부부는 이 질문을 정말 진지하게 서로에게 물어봤단다. 평생 교사와 직장인으로 일하다 정년퇴직한 아내와 남편은 30년간 묻어둔 가슴 속 얘기를 꺼냈다. “나는 애 키우고 학교 다니느라 한 번도 집을 떠난 적이 없었잖아. 앞으로는 해외 여기저기서 3개월씩 살아보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글을 써보고 싶어. 여행 에세이 작가가 되는 게 꿈이야.” “나는 강릉 고향집에 내려가서 나만의 음악실 만들어서 악기 연습하고 친구들 모아서 가끔씩 연주회도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부부는 매우 창의적인 해법을 찾아냈다. 서울의 집을 팔아 작은 집으로 옮기고 그 집을 가족의 ‘베이스캠프’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각자가 원하는 라이프스타일대로 아내는 3개월씩 해외와 서울 집을 오갔고, 남편도 강릉 고향집에 자신이 꿈꾸던 작업실을 마련해 로망을 실현했다. 그리고 가끔씩 모임이 있으면 온 가족이 베이스캠프에서 반갑게 만나곤 했다.

가끔 온 가족이 베이스캠프서 얘기꽃

“앞으로도 우리에게 가장 맞는 삶의 형태로 계속 조정해나갈 거예요. 나이가 들면 건강 문제도 있으니 제가 강릉에 내려갈 수도 있고, 남편이 서울에 올라올 수도 있겠죠. 중요한 건 남들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우리 둘이 서로가 원하는 모습을 인정하고 지원해주기로 했다는 거예요.”

생계 노동자도, 누구의 엄마 아빠도 아닌 온전한 ‘나’로서 살아가는 부부의 얼굴에는 여유와 생기가 돌았다. 너무나 크리에이티브하게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그들을 보며 오랫동안 갖고 있던 고정관념이 깨지는 느낌이었다.

부부가 100쌍이면 100가지 형태의 모습으로 사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우리 머릿속에는 고정관념 때문에 서너 가지의 선택지밖에 없다. 동거, 별거, 이혼, 그리고 졸혼. 나이 들어 이혼은 절대 쉬운 선택이 아니다. 오랜 세월 얽혀 있는 게 너무 많다. 대출도 얽혀있고, 집도 얽혀있고, 가족 간의 인간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이혼과 졸혼, 동거와 별거 사이에도 무수하게 많은 선택지가 존재한다. 무 자르듯 한 번에 결단하지 말고, 각자의 상황에 맞는 최적의 형태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행복한 세컨드 라이프를 만들려면 부부가 무지 창의적이어야 한다.

인생의 수많은 희로애락을 겪으면서도 내 옆에 있는 단 한 사람. 지지고 볶고 싸워도 내 유일한 동지는 옆에 있는 그 사람이다. 30년 함께 애쓰고 희생한 사람의 의리로, 성숙한 인간 대 인간으로, 이제는 진심을 다해 물어봐주자. “당신, 지금부터 어떤 삶을 살고 싶어?”


김미경 / 유튜브 김미경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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