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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돈 귀 질긴

섬에 갇힌 듯 혼자 있다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다 갑자기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 정지하면 뭔가 가까이 왔다는 느낌에 귀 기울인다. 시계 소리만 째깍째깍. 하루가 길고 느리다. 오만 잡생각에 빠져 고리 골짝 옛일로 거슬러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종일 집에 처박혀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누구에게 꿔 준 돈을 받지 않은 것이 있나 생각해 봤다. 물론 없다. 남의 돈을 꾸고 갚지 않은 것이 있나 생각했다. 있다. 왜 그동안 꾼 돈을 잊고 살았을까. 난 작든 크든 돈을 꾸고 갚지 않는 사람을 무척 싫어한다. 그런 내가 어찌 갚지 않았단 말인가.

35년도 넘은 예전에 어떤 분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빌린 적이 있다. “어떻게 큰돈을 담보도 없이 선뜻 꿔 줄 수 있냐?”고 꿔 준 분에게 물었다. “하도 수임이 성질이 까다로워, 꾼 돈을 갚지 않고는 입에 거품 물고 제 성질에 살지 못할 것 같아 믿고 꿔 준다.” 라던 나다. 물론 그분에게 다 갚을 때까지 매달 2부 이자를 드렸다. 참으로 요긴하고 귀한 종잣돈이었다.

내가 돈을 꾼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다. 그녀는 나보다 미국에 일 년 먼저와 자리 잡았다. 난 개뿔도 없는 화가와 결혼해서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그야말로 악전고투 지옥 같았다. 그녀가 어느 날 모 식당에서 하는 여학교 동창회에 오라고 해서 식사비만 가지고 갔다. 그러나 동창회비도 내야 한다는 말에 당황했다. 그녀에게 꿔서 내고 지금까지 갚지 않았다. 물론 동창회는 더는 가지 않았다. 그 후 몇 번을 더 만난 그녀에게 값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수중에 돈이 충분치 않아 갚지 못했다. 그러다가 기억 속에서 잊어버렸다. 아니 완벽히 잊어버리려고 작정한 것 같기도 하다.



당장 갚아야 한다. 버리지 않고 있던 옛날 수첩을 뒤져 행여나 하는 마음에 걸어본 연락처는 닿지 않았다. 그녀 이름과 주소를 구글에서 찾아 전화했지만 마찬가지다. 또다시 찾고 걸고 모두 끊긴 전화번호였다. 동창회에도 연락해 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또 다른 동창을 통해 들은 그녀가 일했던 옛 직장에도 연락했지만 그런 사람은 없단다.

친구는 나에게 돈 꿔주고 달란 말도 못 하고 아예 나를 만나지 않기로 한 것은 아닐까? “그동안 나 잘 먹고 살겠다고 꾼 돈도 갚지 않고 연락도 안 했더니 네가 이사했더라. 나에게 연락해줄래. 코로나바이러스가 물러가면 함께 밥도 먹고 꾼 돈도 갚을게. 너 나 신문에 글 쓰는 것 알고 있니? 중앙일보에 연락하면 알 수 있어. 꼭 연락해. 미안해. 고마워”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투박하고 질긴 그러나 매사 앗쌀하고 깔끔한 함경도 시할머니와의 대화 중 귀에 박힌 한마디는 아직도 생생하다. “돈 귀 질긴(꾼 돈 제때 갚지 않는) 간나들 하고는 상종 말아라.”


이수임 / 화가·맨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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