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6000일 방송…“마이크 앞이 내 자리”
고수를 찾아서 <8> 방송인 정재윤
광고대행사 에드센스 대표
‘천사를 만나세요’ CM 50여곡
작가·무역회사 등 팔방미인
양 방송국서 납치 ‘영입 경쟁’
생방송 시간 늦는 꿈이 직업병
방송쉬며 유튜부·사업 몰두
“MC는 하고 싶은 말 대신
청취자 듣고 싶은 말 해야”
본업이 궁금한 사람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다 본업이다. 라디오방송 진행자, CM송 제작자, 음반제작자, 광고회사 사장, 주요이벤트 MC, 시인, 희곡 작가, 짬뽕전문점 사장, 유튜브 채널 크리에이터까지.
광고대행사 ‘에드센스(ADSense)’ 대표 정재윤(55)씨다. 올해 설립 27년째인 에드센스는 한인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광고대행사 중 하나다. 그래서 애초 그를 ‘광고의 고수’로 소개하려 했다. 인터뷰 취지를 설명했더니 “난 방송 고수인데?”라고 기사 방향을 바꿔달라했다.
#모범생 기타를 잡다
‘귀한 집 자식’으로 컸다. 청주의 부잣집 딸인 어머니와 유명건설회사 임원인 아버지 사이에서 1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창시절 모범생인데다 키 크고 반듯한 외모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부모는 의사나 판검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끼’는 감출 수 없었다. 중3 때 기타를 잡으면서 음악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고 곡을 썼다. 밴드의 리드싱어가 되는 건 자연스러웠다. 경영학도로 대학에 갔지만 이미 미래는 결정되어 있었다.
#축제, 마이크를 잡다
대학 1학년 때다. 여대 학과파티에 사회를 봐달라는 친구 부탁을 받았다. 진행자로 무대에 처음 올랐다.
“전영록, 서유석, 김창완 같은 당대 유명가수들 모창도 하고 사회를 보는데, 호응이 너무 뜨거웠다. ‘오 되네? 난 연예인을 해야하겠구나’ 싶었다.”
88올림픽이 열린 그해 부친 사업이 어려워졌다. 돈을 벌어야 했다. 낮에는 리어카를 끌고 잠실경기장서 김밥도 팔고, 이화여대 앞에서 액세서리도 팔았다. 밤에는 소공동 롯데호텔 스카이라운지, 대학가 카페에서 통기타 치며 노래를 불렀다. 틈틈이 과외도 했다. “당시 가수 한 타임(30분)을 뛰면 10만 원을 받았다. 또 과외도 몇십만 원을 줬고. 일반 회사원보다 더 벌었던 때다.”
재밌는 청춘이었지만 계속 하루 벌이로 살 수는 없었다.
#미국, 탈출구를 잡다
LA에 살던 외삼촌이 ‘미국 오라’ 초청했다. 탈출구로는 최고였다. 하고 싶은 음악 제대로 하면서 성공하고 싶었다. 삼촌 집인 베벌리힐스 저택에서 1년을 지냈다. 그동안 삼촌은 ‘미국 익혀라’면서 매달 적지않은 용돈을 줬다. ‘뒤뜰에 물주고 개밥 주며’ 1년여를 보내던 91년 어느 날 은행에 갔다가 인생 전환점을 맞았다.
“KBS 대학가요제 축제 LA지역 참가자 모집 광고를 봤다. 행사주관사인 스티브신 프로덕션에 무작정 찾아갔다. 내가 쓴 곡들을 들려줬더니 깜짝 놀라더라. 그날부터 행사 프로듀서를 맡았다. 참가자들 곡 써주고, 훈련시키고, 행사 사회보고, 광고 브로셔 디자인까지 도맡아 했다.”
2년간 도맡아 한 가요제가 화제가 되면서 93년 라코에서 진행자 섭외가 들어왔다. 주말프로그램의 새내기 진행자였지만 방송 마이크를 잡으면서 입담은 날개를 달았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황금시간대인 오전 10시 방송을 맡았다. ‘행복이 머무르는 곳에’였다. 그후 26년간 그가 머무른 곳은 정상이었다.
#방송·광고를 잡다
인터뷰에서 그는 본인이 방송 섭외 ‘0 순위’라고 자신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라디오 두 방송국의 ‘납치사건’이다.
98년이었다. 라코에서 노조 결성 움직임이 있었고 해고됐다. 라서로 가기로 계약했다가 라코측이 그러면 되냐면서 다시 일하자는 읍소에 라코로 복귀하기로 했다.
“방송 당일이었다. 집앞에 낯선 밴차량에서 남자 둘이 내리더니 다짜고짜 그를 차에 태웠다. 라서 광고국 직원들이었다. 라서 사무실로 갔더니 자기들과 일하기로 한 약속을 어떻게 어기냐고 따지더라. 어쩔 수 없었다. 라서와 월요일 첫 방송을 하기로 했다.”
방송을 앞둔 주말 금요일 그는 라코에 또 납치됐다. 당시 김모 상무가 그를 다짜고짜 차에 태워 샌디에이고로 달렸다. 그리고 라서측에 전화해 “재윤이 우리랑 방송한다”고 끊었고, 월요일 생방송 직전 LA로 올라와 원고도 없이 복귀방송을 했다.
진행자로 몸값이 오르는 동안 사업도 벌였다. 작은 스튜디오를 차려 CM송을 만들었다. 50여곡 대부분 히트를 쳤다. ‘천사를 만나세요 일년 삼백육십오일~’, ‘프로니까 풀어줘요~’, ‘선셋, 선셋 스튜디오’ 등등 귀에 익은 CM송들은 아직도 방송을 탄다. 음반제작사를 차려 ‘제노스(Xenos)’라는 남성 4인조 아이돌 그룹을 한국에 데뷔시키기도 했다. 신화의 ‘에릭’도 그가 픽업한 가수다. 음반제작을 하다 사기를 당했고 CM 제작을 하면서 기회를 본 광고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웬만한 한인기업, 로컬업소들은 그에게 한번 일을 맡기면 무조건 믿었다. 한때 직원 13명을 두고 연매출 500만 달러를 올려 성공한 사업가로도 불렸다.
책도 3권 썼다. LA호박씨(97년), 한인 33인의 성공자서전 달러를 캐는 사람들(98년), 호박꽃 당신(99년)이다.
돈 버는 여러 직업들은 많았지만 그는 여전히 “마이크앞이 내 자리”라고 했다.
#'팔색조' 정재윤
-방송 쉰다. 요즘 뭘 하나.
“광고회사는 시장 규모가 예전만 못해서 일을 줄였다. 대신 3개월 전 론칭한 유튜브 채널 'JCTV'에 공을 들인다. '문상렬의 월드스포츠', '알약모독(알면 약 모르면 독)', 숀리 TV 등 3개를 운영한다. 문상렬 스포츠전문기자의 채널은 편당 조회 수가 수십만일 정도로 인기가 높다. 또 한국 유명 짬뽕전문점인 '교동짬뽕' 미주지사장을 맡고 있다. 한인타운 마당몰 직영점을 운영하면서 전국에 10개 지점을 열었다.”
-방송 싫을 때도 있었나.
“내 방송이 소음공해로 느껴질 때다. 요즘 라디오방송에선 제품 홍보를 중간에 끼워넣는다. 예를 들어 얼마 전까지 태양광 패널 설치가 인기였다. 월요일은 'ABC솔라', 수요일은 '가나다솔라', 금요일은 'ㄱㄴㄷ솔라' 이런 식으로 회사마다 소개를 해줘야 했다. 제품이 별반 다르지 않은데 타회사보다 낫다고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했다. 청취자들에게 미안해서 한번은 대놓고 말했다. '정말 재미없죠? 어떻게 합니까. 우리도 먹고 살아야죠'하고. 그럴 때 힘들다.”
-생방송 중 실수는.
“아찔했던 기억이 있다. 김일성 사망일(1994년 7월9일)이다. 라코에서 저녁 방송을 맡고 있었다. 그날 방송사 직원 모두가 비치페스티벌에 차출돼서 샌타모니카에 가 있었는데 김일성 사망 속보가 나오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비상전화가 울렸다. 최영호 부사장이 '광고 내보내지 말고 계속 김일성에 대해 떠들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뭐 할 이야기가 있겠나. 뉴스를 해봤나 내가. 그래서 '저…김일성이 죽었답니다. 그런데 왜 죽었을까요?'이런 말도 안 되는 멘트로 몇 시간을 끌었다. 등줄기에 땀 꽤 흘렀다.”
-가슴 아픈 사연은.
“한인타운 8가길 쇼핑몰 주차장에 붕어빵 가판대가 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방송에서 소개했다. '여러분~ 호떡 좋아하세요? 이렇게 정성들여 만든 호떡 처음입니다. 한번 드셔보세요'하고. 그 다음주에 갔더니 호떡 파는 아저씨가 '호떡집에 불났다'면서 내 손을 잡고 너무 고맙다 했다. 그래서 또 한번 소개했다. 그 다음주에 갔더니 가판대가 없어졌다. 누군가가 시샘해서 불법업소라고 신고했다더라. 도와주려고 소개했는데 결국 나 때문에 장사를 못하게 됐다. 도우려는 선의가 상대에겐 선의가 아닐 수 있다는 걸 그때 실감했다.”
-사회도 많이봤다. 안 하고 싶은 행사는.
“자기들끼리 떠들고 농담을 던져도 안 웃으려고 꾹 참는 자리다. 웃긴 얘기하는데 다들 무표정이면 난감하다.”
-라디오방송 인기도 예전만 못하다.
“라디오가 사양 미디어라고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라디오는 바퀴벌레다. 끝까지 살아남을 거다. 한국어 방송을 뭐로 대체할 건가. 거꾸로 생각하면 지금이 한인 라디오방송국들이 제 2의 도약을 할 수 있는 기회다.”
-요즘은 '보는 라디오'가 인기다.
“난 반대다. 얼굴 나가는 게 싫어서 작년 12월에 방송 쉰다 했다. 예전에는 신기해서 다들 영상속 라디오방송 진행자들을 지켜봤지만, 접속자수가 30~40명 정도밖에 안되더라. 유튜브에 재미있는 영상들이 수백만 개인데 누가 라디오방송을 영상으로 보겠나. 라디오도 원칙으로 돌아가 오디오로 승부해야 한다.”
-직업병이 있나.
“요즘도 생방송에 늦는 꿈을 꾼다. 26년 방송하면서 딱 한번 지각한 적 있는데 그 후부터 불안감에 강박관념이 생긴 거다. '진행병'도 있다. 사람 만나면 조용한 걸 못 견딘다. 말이 꽉 차야한다. 방송은 2초만 정적이 흘러도 방송사고니 진행하는 게 버릇이 된 거다.”
-최고 파트너는.
“이영돈씨다. 라서에서 99년~2000년에 투멘쇼를 함께했다. 그때만 해도 남녀 진행자가 공식이었는데 남자 둘이서 진행한 첫 프로여서 화제가 됐다. 여성 진행자는 이정원씨가 호흡이 잘 맞고 '영자의 전성시대(1975년 개봉)' 여주인공이었던 염복순씨도 기억에 남는다.”
-잊지못할 청취자는.
“2000년 라서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코너를 할 때다. 별의별 사연이 많았는데 그중 10.26 사태(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의 범인인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이 사형된 게 아니라 아직 살아있다면서 증거를 갖고 있다는 제보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자는 말에 방송 끝나고 비행기 타고 갔다. 약속한 시내 골목길에서 만났는데 오른쪽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누군가 자기 뒤를 쫓고 있다면서 총을 갖고 왔다더라. 얼마나 무서웠는지…. 자기 집에 증거가 있다고 가자는데 어떻게 가나. 그날 밤 비행기로 바로 돌아왔다.”
-방송 후배들에게 한마디.
“본인의 가치는 방송국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부단히 노력해서 나만의 스타일을 갖게된다면 가치는 올라가게 되어 있다.”
-남은 꿈이 있나.
“만족한다. 89년에 맨몸으로 LA에 떨어졌는데 31년이 지난 지금 기자가 날 '고수'로 인터뷰해주니 성공한 인생이다. 하나 남은 건 영화 시나리오나 드라마 각본을 쓰고 싶다.”
-인생 고수는.
“방송의 고수를 말할 순 있다. 나만의 원칙이 있다면 방송은 쉽고, 재밌고, 간단해야 한다. 다양한 어휘나 현란한 표현보다 꾸미지 않는 진심이 청취자에게 전달되어야한다. 그래서 MC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상대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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