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수프를 끓이다
"여태 팥죽 한 그릇
끓여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을까"
아하, 이거구나. 설명서를 볼 수 없어 수프를 망쳤구나. 나도 전에 한번 설명서를 보려 스티커를 떼다 떼다 실패했다. 마켓에서는 왜 하필 성분표시 스티커를 조리법 위에 붙이는지 모르겠다. 다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오랜만에 대하는 사람은 조리법을 봐야 올바르게 끓일 수 있다. 그래도 얄궂게 유효날짜 위에 붙이는 것보다 낫긴 하다.
점심시간에 아들에게 전화했다. 물을 끓인 다음에 수프가루를 넣었다고 한다. 라면같이 끓이면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아들은 수프를 조금 먹었다고 한다.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둘이 한참 웃었다. 남이 하는 일을 맨날 옆에서 보고 있어도 내가 할 때는 제대로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죽을 써 본 경험이 없는 아이다. 찬물에 수프를 넣었더라도 아마 젓지 않고 팔팔 끓였을 것이다. 그러면 수프가 우르르 끓어 넘쳤겠지. 이래저래 아침은 굶고 갔을 테고. 죽 쑤기가 어디 쉬운가. 나도 죽 쑤다 물을 더 부어 망칠 때가 있는데. 물의 양과 불 조절을 잘하고 끈기있게 저어야 한다. ‘죽 쒀서 남 준다’는 말은 이렇게 공들여 끓인 죽이어서 나온 말이라 믿는다.
아들은 물을 먼저 끓이다 수프가루를 넣었다. 가루가 풀리지 않고 멍울멍울 뭉치자 수프를 채에 걸렀다. 멍울을 건져내고 나머지 뿌연 국물을 수프라고 먹었다. 멍울을 거르느라 이 그릇 저 그릇을 꺼내 이리저리 수프를 옮겨 담았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먹을 만했다고. 멀덕국을 먹고 한국산 수프는 원래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모르는 게 약이다. 알았더라면 그 바쁜 아침 시간에 여유있게 천천히 수프를 끓일 리가 없다. 이게 다 조리법을 스티커로 가린 탓이다. 무심코 한 일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하나 남아있는 양송이 수프를 끓였다. 내 입맛이 변했나, 오랜만에 먹어서인가, 한국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다. 조미료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들쩍지근한 게 글쎄, 어느새 내 입맛이 미국제품에 길들여졌나. 오리건 바닷가에 모스(Mo's)라는 클램 차우더로 유명한 수프집이 있다. 커다란 통에 수프를 가져다주면 각자 그릇에 국자로 퍼서 덜어 먹는다. 맛이 진국이다. 그 수프가 생각나면 마켓에 가서 클램 차우더 수프를 사다 끓였다. 그러는 사이 내 입맛이 미국 수프에 길들었나 보다.
‘죽’하면 나는 쌀을 불려서 믹서에 갈아서 쑤는 게 제일 좋다. 배탈이 났을 때, 감기로 입맛이 없을 때, 예전에 어머니가 해주신 것처럼 끓이면 정말 맛나다. 먹을 걸 생각하면 꼭 어머니가 등장한다. 맨 죽이라야 탈도 없고 맛도 개운하다. 영양가를 생각해서 죽에 이것저것 첨가하면 느끼하다. 참기름도 넣지 않고 소금만 조금 넣는 게 담백하고 질리지 않는다. 질리지 않는 맛은 어머니의 솜씨다.
한동안 죽을 끓인 적이 있다. 딸아이가 치과에서 이를 빼 음식을 씹기 힘들었다. 각종 채소를 잘게 썰어 넣고 익히다 밥을 넣고 더 끓이는 약식 죽이다. 가끔은 간 소고기나 달걀을 더하기도 했다. 밥을 오래 끓이면 끈기가 생겨 고소하다. 죽을 쑬 때는 무엇보다 끓어 넘치지 않게 잠시도 한눈팔지 말아야 한다. 그 시간은 잡념도 없이 오로지 먹을 사람을 위해 집중한다. 인스턴트와 홈메이드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정성껏 맛을 우려내는 것, 사랑을 우려내는 것이다.
나는 딸을 위해 죽을 쑤었다. 어머니도 나를 위해 죽을 쑤었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를 위해 죽을 쑨 적이 없다. 딸 넷 가운데 어느 딸이 어머니를 위해 죽을 쒀 드린 적이 있을까? 음식은 남이 해줘야 맛있는데, 어머니는 팥죽을 좋아하시는데, 어머니 연세가 아흔이신데…. 왜 나는 여태 어머니에게 팥죽 한 그릇 끓여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을까. 한국에는 입맛을 돋우는 죽 전문점이 많아 편안하게 사 먹을 수 있다지만 아무렴 집에서 끓인 것만 할까. 다음에 한국에 가면 어머니에게 팥죽을 쒀드려야겠다. 그게 언제가 될지 나도 모르겠다. 너무 늦어버려 후회할 일이 생기면 안 될 텐데. 그런데 어느 자식이 나를 위해 죽을 쒀 주겠는가, 그것도 의문이다.
신순희 / 수필가· ‘월간문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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