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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프를 끓이다

"여태 팥죽 한 그릇
끓여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을까"

[중앙포토]

[중앙포토]

아침에 일어나니 부엌이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다. 아들아이 탓이다. 어제저녁 사다 놓은 한국산 양송이 수프가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열심히 수프 포장지를 들여다본다 했다. 맨날 미국 수프만 보다가 신선하기도 했겠다. 학교 가기 전 아들이 수프를 끓인 자국이 남아있다. 멍울멍울 걸쭉한 밀가루 풀이 남겨져 있고 싱크대에는 거르는 채와 큰 그릇 몇 개가 나와 있다. 쓰레기통에 수프 겉봉지가 찢겨 있는데 조리법이 적혀있는 부분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떼느라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아하, 이거구나. 설명서를 볼 수 없어 수프를 망쳤구나. 나도 전에 한번 설명서를 보려 스티커를 떼다 떼다 실패했다. 마켓에서는 왜 하필 성분표시 스티커를 조리법 위에 붙이는지 모르겠다. 다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오랜만에 대하는 사람은 조리법을 봐야 올바르게 끓일 수 있다. 그래도 얄궂게 유효날짜 위에 붙이는 것보다 낫긴 하다.

점심시간에 아들에게 전화했다. 물을 끓인 다음에 수프가루를 넣었다고 한다. 라면같이 끓이면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아들은 수프를 조금 먹었다고 한다.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둘이 한참 웃었다. 남이 하는 일을 맨날 옆에서 보고 있어도 내가 할 때는 제대로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죽을 써 본 경험이 없는 아이다. 찬물에 수프를 넣었더라도 아마 젓지 않고 팔팔 끓였을 것이다. 그러면 수프가 우르르 끓어 넘쳤겠지. 이래저래 아침은 굶고 갔을 테고. 죽 쑤기가 어디 쉬운가. 나도 죽 쑤다 물을 더 부어 망칠 때가 있는데. 물의 양과 불 조절을 잘하고 끈기있게 저어야 한다. ‘죽 쒀서 남 준다’는 말은 이렇게 공들여 끓인 죽이어서 나온 말이라 믿는다.

아들은 물을 먼저 끓이다 수프가루를 넣었다. 가루가 풀리지 않고 멍울멍울 뭉치자 수프를 채에 걸렀다. 멍울을 건져내고 나머지 뿌연 국물을 수프라고 먹었다. 멍울을 거르느라 이 그릇 저 그릇을 꺼내 이리저리 수프를 옮겨 담았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먹을 만했다고. 멀덕국을 먹고 한국산 수프는 원래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모르는 게 약이다. 알았더라면 그 바쁜 아침 시간에 여유있게 천천히 수프를 끓일 리가 없다. 이게 다 조리법을 스티커로 가린 탓이다. 무심코 한 일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하나 남아있는 양송이 수프를 끓였다. 내 입맛이 변했나, 오랜만에 먹어서인가, 한국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다. 조미료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들쩍지근한 게 글쎄, 어느새 내 입맛이 미국제품에 길들여졌나. 오리건 바닷가에 모스(Mo's)라는 클램 차우더로 유명한 수프집이 있다. 커다란 통에 수프를 가져다주면 각자 그릇에 국자로 퍼서 덜어 먹는다. 맛이 진국이다. 그 수프가 생각나면 마켓에 가서 클램 차우더 수프를 사다 끓였다. 그러는 사이 내 입맛이 미국 수프에 길들었나 보다.

‘죽’하면 나는 쌀을 불려서 믹서에 갈아서 쑤는 게 제일 좋다. 배탈이 났을 때, 감기로 입맛이 없을 때, 예전에 어머니가 해주신 것처럼 끓이면 정말 맛나다. 먹을 걸 생각하면 꼭 어머니가 등장한다. 맨 죽이라야 탈도 없고 맛도 개운하다. 영양가를 생각해서 죽에 이것저것 첨가하면 느끼하다. 참기름도 넣지 않고 소금만 조금 넣는 게 담백하고 질리지 않는다. 질리지 않는 맛은 어머니의 솜씨다.

한동안 죽을 끓인 적이 있다. 딸아이가 치과에서 이를 빼 음식을 씹기 힘들었다. 각종 채소를 잘게 썰어 넣고 익히다 밥을 넣고 더 끓이는 약식 죽이다. 가끔은 간 소고기나 달걀을 더하기도 했다. 밥을 오래 끓이면 끈기가 생겨 고소하다. 죽을 쑬 때는 무엇보다 끓어 넘치지 않게 잠시도 한눈팔지 말아야 한다. 그 시간은 잡념도 없이 오로지 먹을 사람을 위해 집중한다. 인스턴트와 홈메이드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정성껏 맛을 우려내는 것, 사랑을 우려내는 것이다.

나는 딸을 위해 죽을 쑤었다. 어머니도 나를 위해 죽을 쑤었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를 위해 죽을 쑨 적이 없다. 딸 넷 가운데 어느 딸이 어머니를 위해 죽을 쒀 드린 적이 있을까? 음식은 남이 해줘야 맛있는데, 어머니는 팥죽을 좋아하시는데, 어머니 연세가 아흔이신데…. 왜 나는 여태 어머니에게 팥죽 한 그릇 끓여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을까. 한국에는 입맛을 돋우는 죽 전문점이 많아 편안하게 사 먹을 수 있다지만 아무렴 집에서 끓인 것만 할까. 다음에 한국에 가면 어머니에게 팥죽을 쒀드려야겠다. 그게 언제가 될지 나도 모르겠다. 너무 늦어버려 후회할 일이 생기면 안 될 텐데. 그런데 어느 자식이 나를 위해 죽을 쒀 주겠는가, 그것도 의문이다.


신순희 / 수필가· ‘월간문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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