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지던트데이 특집1]위대한 대통령, 그 뒤엔...조지 워싱턴의 흔적을 찾아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끌어내고, 연임 대통령직을 지낸 조지 워싱턴. 그는 3선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고 은퇴 후 고향인 마운트 버넌에 돌아갔다.
마운트 버넌은 방문객들로 늘 북적였다. 조지 워싱턴은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따뜻한 숙소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며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부인이 당대 최고의 부자였음에도, 전직 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장을 돌볼 자금을 은행에서 빌릴 정도였다.
14일 오후 마운트 버넌의 해설사도 따뜻하게 방문객을 맞았다. “조지 워싱턴 뿐만 아니라 토머스 제퍼슨 등 손님들도 모두 이 계단을 거쳐 올라갔어요. 그 분들의 DNA를 느끼고 싶으면 이 층계를 만져보세요 (웃음)”
해설사가 장난스럽게 건넨 말이었지만 실제로 그곳에는 200년도 더 된 그 시절의 숨결이 남아있었다. 벽난로, 층계, 바닥, 집 기둥 등 대부분의 것들이 그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식사가 이뤄졌던 다이닝룸은 1735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사진1)
▷워싱턴의 숨결이 가장 많이 담긴 곳, 서재
조지 워싱턴은 일생동안 2만통의 편지를 썼다. 그는 마운트 버넌에서 생활하는 동안 서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조지 워싱턴의 서재는 그의 초대 없이는 출입이 불가했다. 오롯이 워싱턴 혼자만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워싱턴은 아침 먹기 전 서재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저녁 식사 뒤에도 그곳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식사 뒤 노예들은 보통 워싱턴의 차와 다과를 서재로 갖다주곤 했다.
▷“나 죽거든 노예를 풀어주오”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왕이 되어달라는 국민의 성원에도 그는 과감히 욕심을 접고 그가 살던 마운트 버넌으로 돌아왔다.
워싱턴은 운영했던 농장 규모, 일 년에 몇 백명씩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많은 노예를 부릴 수 밖에 없었다. 결혼할 당시 50여 명이었던 노예가 그의 사망 직전에는 316명으로 늘어났다.
노예는 요리사, 정원사, 구두 수리공 등 각 분야별로 있었다. 노예 전용 숙소가 따로 마련돼있었다. 노예들은 각자의 하루 업무가 끝나면 숙소로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워싱턴은 1799년 자필로 42페이지에 달하는 긴 유언장을 작성했다. 유언장의 내용에는 ‘개인 시중을 든 윌리엄을 노예 신분에서 즉각 해방하고 그에게 연금 30달러를 줄 것이며, 아내가 죽으면 나머지 노예들도 해방시켜달라’는 항목이 포함돼있었다.
1799년 12월 12일, 추운 날씨에 말을 타고 돌아다니던 워싱턴은 갑자기 목이 붓고 심한 고통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 부인인 마사에게 숨쉬기 고통스럽다고 말하면서도 그녀가 감기에 옮을까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았다. 당대 최고의 의료진이 그의 치료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는 향년 67세의 나이로 1799년 12월 14일 소천했다.
▷보이지 않는 내조의 여왕, 마르다 워싱턴
워싱턴은 1759년 당대 미국 최대 갑부 중 한 명인 마르다 커스티스(Martha Custis)와 결혼했다. 마르다는 당시 3천명이 넘는 노예와 1만7000 에이커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부자였다. 매우 지적이고 우아한 태도를 지녔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워싱턴과 마르다가 진정한 사랑이 아닌 ‘우정’의 관계라고 평하지만 마운트 버논에서 느낀 그들 관계는 사뭇 달랐다.
마운트 버넌에서 요리 업무를 맡은 노예들은 하루 평균 16시간을 주방에서 보냈다. 7시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4시부터 요리를 시작했다. 아침 식사 뒤에는 바로 점심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워싱턴 가족은 오후 3시에 저녁식사를 했기 때문에 쉴 틈도 없이 바로 저녁 식사도 준비해야했다. 저녁식사 뒤에는 다음날 먹을 음식에 대한 대비를 해야 했다.
워싱턴의 부인인 마르다도 하루에 4번 주방에 드나들며 식사를 점검했다. 아침 6시 반에는 아침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나 확인했다. 아침 식사 후인 오전 8시에는 노예들과 저녁 메뉴를 상의하며 저녁 때 먹을 터키를 골랐다. 저녁 식사 1시간 전인 오후 2시에는 식사 준비가 잘 돼가나 확인했다. 저녁 식사 뒤인 오후 7시에는 다음날 먹을 음식이 충분한지 점검했다.
당대 최고의 부자였지만 마운트 버넌에서는 세심하게 남편을 내조하는 그녀였다.
마르다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남편과 함께 사용하던 침실을 더이상 사용하지 않고 3층 침실을 썼다. 또한 괜한 뒷말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고자 조지 워싱턴과 생전 주고받았던 편지들도 모두 불태워버렸다.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워싱턴이 남긴 대부분의 것들은 마운트 버넌 기념관에 전시돼있다.
역사 속 수많은 권력자들은 제도를 무시하고 장기 집권을 획책했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기존 제도들을 강제로 바꾸어 가면서 최고 권좌를 탐해왔다. 거의 동시대인 나폴레옹이 그랬으며, 로마의 카이사르가 그러했다. 그렇기에 조지 워싱턴이 최고의 권자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운트 버넌=김효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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